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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byell Sep 29. 2022

위로를 기억하는 법 | 단호박 만쥬

추분 - 낮과 밤의 교차점

나에게 있어 단호박은 소울푸드 그 자체이다.


타향 생활 중에는 위로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기분이 우울할 때, 마음이 힘들 때, 주변 상황이 힘에 부칠 때. 그런 때마다 몽글한 음식이 주는 따뜻함이 절실했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기 힘든 내가 매번 마음을 기댔던 음식이 단호박 죽이었다.


너무 달지 않게 뭉근히 끓여내면 그 따뜻한 온도만으로도 근심이 조금은 녹아 없어졌다. 새알심까지 올려 크게 한입 뜨면 노곤한 맛이 허기진 마음속으로 한가득 채워진다. 지평선에 걸린 갓 떠오른 달이 녹아내린다면 이런 맛일까? 그러다가도 해가 지기 직전의 노을빛 같은 호박색의 따뜻함에 오히려 내가 녹아내린다. 어린 왕자가 마음이 좋지 못한 날 노을에게 받는 위로가 필요했듯이 나는 노을빛의 단호박의 위로가 있어주었던 것이다.


단호박은 단단함에 비해 빠르게 익고, 곱게 으깨어지기 때문에 메인과 디저트를 구분하지 않고 여러 요리에서 쓰임이 좋은 채소이다. 더욱이 진노란 색깔과 은은한 단맛은 그 자체로도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마치 나의 단호박죽처럼.


넘칠 것 같은 감정을 소화하기만으로도 벅찬 날, 정작 입으로 들어오는 것의 소화는 안중에도 없는 날이면 단호박죽으로 속이 아닌 마음을 달래곤 했다. 어쩌면 단호박 만쥬는 고된 시간을 함께해준 단호박에게 전하는 나의 마음이 형상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만쥬는 만두와 그 발음이 유사한 것만큼이나 만드는 방법도 비슷하다. 속을 만들고, 반죽으로 그 속 재료를 감싼다. 다만 만쥬는 보통 단맛을 내는 앙금을 사용하기에 디저트로 그 입지를 굳혔다. 오늘은 단호박으로 단호박을 만들어볼까 한다. 단호박 모양과 맛을 가진 단호박 만쥬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넨다.


익히지 않은 단호박은 매우 단단하다. 언젠가 단호박을 손질하다 층간소음으로 한소리 들은 적이 있을 정도로 그 단단함이 남다르다. 하지만 단호박도 손질하는 꿀팁은 있기 마련이다. 꼭지를 따고, 전자레인지에 1분씩 나누어 돌린다. 겉 부분이 고루 따뜻해지면 그때부터 손질한다.

단호박을 살짝 익혀주는 것만으로도 훨씬 쉽게 손질할 수 있다. 처음의 경계를 풀고 단단한 장막을 슬며시 내려놓는 듯하다. 단호박은 안쪽의 씨 부분만 제거하고 찜기 안에서 푹 익혀준다. 온 집안이 단호박 냄새로 가득 찬 뒤 코가 그 향에 익숙해질 때쯤, 호박을 불에서 내린다.


불려둔 병아리 콩도 중불에서 뭉근히 끓여낸다. 설탕과 함께 졸여진 병아리콩은 그냥 먹어도 매력적인 맛이다. 오늘은 이 낯선 재료로 흰 앙금을 만들어 볼까 한다.

잘 익은 단호박은 노란 속살만 따로 준비한다. 병아리콩은 잘 익힌 뒤 믹서로 곱게 갈아 불에 한번 더 졸인다. 촉촉한 앙금의 텍스쳐가 완성되면 단호박, 호박씨와 함께 잘 섞어 앙금을 완성한다.


레시피에는 넣지 않았지만 계핏가루를 더해 맛에 변주를 줄 수 있다. 약간의 계핏가루만으로 자칫 단맛이 줄 수 있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앙금이 완성되기 전, 병아리 콩이 익어가고 있을 때 즈음 만쥬 반죽을 준비한다. 모든 재료를 한데 섞어 충분히 냉장 휴지를 시킨다. 이때 단호박의 껍질 색이 날 수 있도록, 계란의 비린내를 잡을 용도로 녹차가루를 더한다.

그렇게 앙금이 완성되고, 반죽이 충분히 차가워지면 본격적으로 만주를 만든다. 약간은 흘러내리고, 손에 잔뜩 들러붙는 반죽을 덧가루로 진정시켜가며 그 속을 앙금으로 가득 채운다. 젓가락과 호박씨로 호박의 모양을 만든다. 옆구리가 터지지 않게 아기 다루듯 조심히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계란물을 칠해줘도 좋지만, 계란물 없이도 충분히 예쁜 색이 나온다. 보다 어두운 갈색과 광택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계란물을 발라주는 것도 좋다.

호박 모양으로 완성된 만주 속에는 호박색 앙금이 한가득이다. 색뿐만 아니라 호박의 맛과 향도 가득 들어있다. 포삭하고 달달한 위로의 맛이 이 작은 디저트로 응축되어 있다. 하루정도 냉장고에 묵혀두었다 먹으면 앙금의 수분이 반죽으로 적당히 옮겨가 한결 맛있는 상태가 된다. 여기에 따듯한 차를 곁들이면 퍽퍽한 식감 속에 숨겨진 단호박의 향을 폭발시킨다.


마음이 힘든 날 나의 위로가 되어준 힐링푸드, 단호박 그 자체인 단호박 만쥬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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