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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레이첼 Sep 24. 2023

엄마, 나 서울가

화병과 건강염려증

여자가 거울 속 자신에게 대화를 건네는 시기가 40대 중반이라면 늦은 것일 테다. 나는 그렇게 나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셀카를 찍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어떻게 자신을 마구 찍어대고는 SNS에 공유하는지 궁금했다. 나 자신과도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과 SNS에서 솔직하게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난 늘 무슨 일이 생기면 상대에게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하며 '을'노릇이 당연했다. 그렇게 나를 잃기도 하고 잊기도 했다. '내 인생의 방관자가 되지 말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셀카 속에서 드러난 내 얼굴 속 눈동자가 너무 슬프다는 것을 알고서부터이다.


내가 생각했던 나는 누구였을까? 남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지만 그것도 때론 헛수고였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서 그런지 내속 안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자아는 나를 돌보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기보다는 내 안에 있던 불안으로 잠재우려 했다. 불안도 습관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듣고 보던 환경에서 전염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 불안한 감정을 '화병'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에든 집착을 해야 했다. 그것이 나쁜 것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내 불안을 건강 염려증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했다. "뭔가 더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걱정을 하면 안 올지도 몰라. 얼른 내가 막아줘야지". 불안은 샤머니즘을 믿던 조상들에게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부적처럼 내 몸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건강 염려증이 나를 보호할리는 만무였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잉태한다. 결국 걱정은 내 몸의 면역체계를 갉아먹었고 나이가 드니 하나씩 둘씩 증세를 드러냈다. 뭔가 무슨 일이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추측이 소변에 하얀 찌꺼기가 둥둥 떠다니는 눈에 보이는 증세가 되었다.


"엄마, 나 아이들 셋 두고 죽으면 어떻게 해" 혼자 흐느껴 울었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고 남편이고 뭐고 엄마를 봐야 살 수 있었다. 어떻게 엄마도 없이 22년을 버텼을까? 엄마가 해주던 소금만 넣은 콩나물 국과 손 만둣국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엄마, 나 서울가"

한국을 떠나온 지 10년이 되던 해, 막내가 6살 때 나는 한 번도 두고 떠난 적이 없던 세 아이들을 밴쿠버에 두고 한국으로 떠나 버렸다.




사진 : Leesa M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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