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inmaker Oct 23. 2024

자목련 한 송이

   시드니발 QF367 콴타스비행기는 오후 다섯 시 사십 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죠. 늦봄의 해가 서쪽 바다 쪽으로 고개를 숙여가고 있었어요. 삼십삼 년 동안 보지 못한 그를 나는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도 삼십삼 년 동안 보지 못한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각 항공기에 연결된 보딩브리지를 통해 승객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들어갔어요. 나는 시간에 맞추어 입국승객들이 빠져나오는 공항터미널 2층으로 향했어요. 


   비행기가 보딩브리지에 닿는다. 해가 넘어가고 있는 바다 쪽은 황금 물비늘 물감을 풀어놓아 싱그럽다. 보딩브리지를 걸어 나와 입국 게이트로 간다. 나는 조국에 왔다. 누군가 지금의 순간을 낯설다고 쓴다면 나는 낯익다고 읽을 것이다. 삼십삼 년 동안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공항의 대합실조차도 낯설지가 않다. 대합실을 가득 메우고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다. 혹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포옹을 하고 악수를 나눈다. 각 나라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온다. 나는 문득 자운영을 생각한다. 홍자색의 꽃들이 끝없이 드넓은 논밭을 가득 매웠다. 봄날의 절정에서 자운영은 아지랑이의 유혹을 떨쳐내고 한껏 피어올랐다. 그렇게 피어나 봄날의 해살픈 게으름에 온몸을 내맡긴 드넓은 논밭을 덮고 있었다. 조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판에 나가 보았던 풍경이었다. 자운영은 요란스러운 봄을 대신할 수 있는 완강한 풀꽃이라고, 그때 신뢰가 되었다. 공항터미널 대합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 모든 이들이 홍자색 자운영처럼 보인다. 나는 지금 공항터미널에서 자운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한 여인을 발견한다. 너무 오래도록 본 적은 없지만 낯설지 않다. 


   입국수속을 마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어요. 몇몇 입국게이트를 통해 사람들은 계속 나오고 있었죠. 나는 까치발을 세우고는 두리번거렸죠. 그가 나를 몰라보는 것보다 내가 그를 모를까 봐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어요. 나는 대합실을 둘러보았어요. 그때 여행용 캐리어를 세워두고 외투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사내를 발견했죠. 흰머리가 희끗거리는 사내는 그렇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손으로 막았죠. 손끝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어요. 그 순간 떠올랐어요. 그 모습이 너무도 흡사했거든요. 늦은 봄 자락 틈에서 이제 막 보랏빛 몸을 비틀며 피어나고 있는 자목련 한 송이를 본 것입니다.


   나는 사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어요.  -  (끝)

이전 16화 우리에게 남겨진 대한의병 참모중장의 총알 한 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