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많은 아진이가 샘이 난다. 나는... 그녀의 선생이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반달 눈웃음, 애교 섞인 말투, 수학 익힘책 도전 문제도 척척 풀어내는 브레인까지... 아진이는 친구들에게(특히 남자친구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교우관계 상담지에서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란에는 그녀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김서준 당첨이다! 오늘은 네가 최아진 앞자리!”
“아 뭐야~ 왜 또 나야!”
급식실에서 아진이의 앞자리가 누구인지는 남자아이들 사이의 화젯거리다. 오늘은 서진이가 당첨됐다. 서진이의 입꼬리는 말과는 다르게 실룩거린다.
쉬는 시간에 남몰래 그녀를 세모눈 뜨고 바라본 적이 있다. 부족한 게 없는 게 부족한 점이랄까... 엄친아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건가 싶고 아진이가 쓰는 변기에는 꽃향기가 날 것 같다. 나도 이런 마음인데 우리 반 여자애들은 아진이가 얼마나 부러울까? 의외로 별생각이 없을까?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샘을 내는 걸까? 담임선생님이라는 작자가 열세 살 초딩한테 말이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 나에겐 항상 선망의 대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쁘고 성격 좋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와 내 모습을 비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얼굴은 고등학교 삼 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경래다. 찹쌀떡처럼 뽀얀 경래는 팔다리가 얇고 길쭉한 데다가 이목구비는 병아리처럼 오밀조밀 귀여웠다.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교복도 몸에 딱 붙게 입고 다녔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앞머리에 핀을 꽂고 집중해서 공부하는 모습조차 청춘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았다. 집에 가서 경래가 핀 꽂는 방법을 따라 해보기도 했는데 핀 꽂기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말았다.
경래는 성격도 털털해서 친구들과 두루 잘 어울렸는데 난 그녀와 쭈뼛쭈뼛 거리를 두었다. 지저분한 곱슬머리, 촌스러운 뿔테, 각종 여드름까지 더해진 열여덟 살의 내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 옆에 서면 나는 커다란 못난이 인형 같았다. 지독하게 창피했다. 그렇게 독한 감정을, 살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품어본 적이 있을까. 못난이 인형은 대학시절까지 곁에 머무르며 나를 한참 갉아먹었다. 곱슬머리를 파마로 곧게 펴보아도, 무리하게 라섹 수술을 해서 뿔테 안경을 벗어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나는 또 다른 경래를 만들고 나와 비교했다.
처음에는 아진이에 대한 내 감정이 어이없고 당황스러웠다. 학생에게 질투를 느끼는 선생님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아진이와 경래가 자꾸 겹쳐 보인 후에 알았다. 자신에게 조차 사랑받지 못한 열여덟 살의 내가 아진이를 샘내고 있는 거였다. 한이 많으면 세상을 뜨지 못하고 귀신이 된다고 들었다. 얼마나 서러웠길래 못난이 인형, 아니 귀신이 되어 이토록 오래 머물러 있는 걸까?
"샘, 왕이 넘어지면 뭘까~요?"
"나 그거 알아. 킹콩!"
"땡! 왕이 넘어지면.... 아프다! 왕도 사람이잖아요~"
"^^::::"
세상에. 아진이가 이제 아재 개그까지 날린다. 약간의 빈틈도 생겼으니 이제 인간미까지 갖추게 된 그녀다. 내가 요즘 자기 때문에 캐캐 묵은 기억을 들추며 성찰의 시간을 보내는지는 새까맣게 모르겠지. 몰라야 한다. 쭈꾸리 선생이 속내를 들키고 부끄럽다고 해서 반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진이에게 아직도 샘이 난다. 아진이처럼 살랑거리는 모습과 성격이었다면 사는 게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 앞에서 유독 삐죽거리는 조동아리를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진이의 수학 시험지를 유독 엄격하게 채점하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싶다. 문제는 스스로 상처 낸 채로 남아있는 내 마음이다.
내 곁을 아직 못 떠난 열여덟 살 못난이 귀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줘야지 싶다. 달래줘야지 싶다. 피부가 뽀얗지 않아도, 머리핀 촌스럽게 꽂아도 잘 산다고. 생각보다 용기 있게 삶을 풀어갈 테니 걱정 말라고. 우리 부모님 사이에서 이 정도면 성공한 작품이라고(엄마아빠 미안). 너 있는 그대로 좋다는 남자도 나타날 테니 애쓰지 말라고. 그리고 사과해야겠다. 자꾸 너랑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 미안하다고. 당장 화 풀지 않아도 되니까 옆에 앉아 있겠다고.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없는 애교도 부려봐야겠다. 그 아이의 응어리진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그러다 보면 교실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아진이를 만나도 세모눈은 안 뜰 수 있지 않을까. 경래 얼굴이 잠시 떠올라도 씨익 웃어넘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