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

by 랑랑

루프린으로 난소를 잠재우고 나면 갱년기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시도 때도 없이 으슬으슬했다가 어느 순간 온몸으로 열감이 폭발한다. 얼굴과 두피, 손발 등에 땀이 나면서 짜증이 솟구치며 예민과 우울도 심해진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난소보호주사인 루프린의 부작용이지만 주사를 맞지 않아도 '암 환자'라는 현실은 우울감 속으로 고립되기에 최고의 조건이었다.


암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나 SNS에서나 뜻하지 않게 잠수를 타버린 나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카카오톡, 문자, 전화가 여러 번 왔지만 답장을 할 수 없었다. 내 입으로, 내 손으로 암 환자가 되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을 통해 친척들에게는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전화를 받지 않자 위로의 메시지가 쇄도했다. 하루에도 몇 통이나 받는 그 '힘내'라는 말이 왜 이렇게도 싫은지. 낼 힘이 없는데 무슨 힘을 내란 말인가. 직장에 간혹 상황을 전해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퇴원을 하고 항암이 결정되었을 때 암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SNS에 게시를 하였다. 그동안 쌓여있던 메시지와 전화에 일일이 답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나라 인구 3~4명 중 한 명이 암 환자라고 할 정도로 암은 흔한 질병인데 내 주변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암 환자가 없다. '첫 암 환자'라는 타이틀을 얻은 나에게 주변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설프게나마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위로의 댓글이 달렸다.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SNS에 암밍아웃(?)을 하기가 무섭게 팔로우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교류하지 않지만 건너 건너 얼굴과 이름만 겨우 아는 사람들까지도 내 글을 구경하였다. 그중에는 넉살 좋게 힘내라는 댓글을 다는 사람도 있었다. 불쾌했다. 동물원 푸바오가 된 기분이었다. 그동안 걱정했을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큰 마음먹고 알렸던 나의 암투병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구경거리에 사소한 입방아에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왔다. SNS를 비공개로 돌리고 언저리 불청객들을 모두 차단했다.




탈모 부작용이 있고부터는 우울감이 더 자주 찾아왔다. 한번뿐인 인생, 대머리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가볍게 해 본 적이 있지만 이러한 이유로 대머리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리카락이 걷잡을 수 없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막연히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 강원도로 향했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운전해서 도착한 곳은 하조대 해수욕장.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사장에 앉아서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모른다. 칼바람에도 머리카락은 쑥쑥 뽑혀 나갔다. 동해바다의 새까만 수평선은 앞으로의 내 삶과 같이 느껴졌다. 그 깊이와 온도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 한참을 목놓아 울었더니 속이 꽤나 후련해져서 바닷물로 뛰어드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나의 예민과 짜증이 잦아지자 엄마는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라 권하였다. 그 말에 또 한 번 폭발을 하였다. 담당 교수님도 암센터와 정신과의 협진은 곧 잘 이루어지기 때문에 힘들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추천해 주었는데 썩 맘에 내키지가 않았다. 이미 처방받은 부작용약을 매일 같이 배부르게 먹고 있는데 정신과 약을 또 먹고 싶지 않았으며 암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아무리 권위자라 해도) 어설프게 위로한답시고 몇 마디 지껄이는 말은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그 당시 감정 해소만 그때 그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 도 유튜브를 보다가도 게임을 하다가도 눈물이 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속 시원하게 목놓아 우는 것만으로도 후련할 것 같은데 소리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줄줄 흘리는 걸로 엄마는 기겁했다. '네가 울면 나는 더 힘들다.'며 당신이 힘든 것을 이유로 내 감정 또한 삼키길 바랐다. 우울하고 답답한 감정은 삼켜지지 않는다. 잠시 눌러 놓을 뿐 언젠가 어디에선가 터지게 된다. 흔히 암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내가 당사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운 나쁘게 우리는 암환자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억울하고 속상했다. 암은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어지는 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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