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아직 아무도 집에 오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 I WILL BE BACK을 말했던 터미네이터는 결국 다시 돌아와 존 코너와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그 과정을 망각하게 결국에는 다시금 겪어도 버틸 수 있는 동력인 건가? 아니면 영화적인 그저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심심하니 별 생각이 든다. 시간을 보니 9시가 넘어간다. 평소였으면 5분 만에 모든 일을 끝내고 왔을 텐데 벌써 나간 지 3시간이 지나간다. 핸드폰을 봤지만 친구들의 카톡뿐 정작 와야 할 연락은 오지 않았다. 불안해진다.
몸을 일으키고 옷을 입었다. 집 앞에 있는 따릉이를 타고 익숙한 그곳으로 향한다. 아까 많이 내렸던 비 탓에 곳곳에 웅덩이가 가득하다. 웅덩이를 피해 이리저리 핸들을 조작한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찰나 옆 버스의 자그마한 움직임에 물을 잔뜩 뒤집어썼다. 흠뻑 젖은 생쥐꼴이 되어버린 채로 경찰서에 도착했다. 저 멀리 이 순경이 보인다.
"철수야 꼴이 이게 뭐야?, 너 왜 왔어?"
"오다가 웅덩이 물이 튀어서요. 엄마는요?"
"엄마랑 아빠 둘 다 안에 계셔. 근데..."
그새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니깐 애가 아파서 이상한 소리 한 거라니까요?"
"어머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저희도 신고가 들어온 이상 해야 하는 과정이 있어서니깐 좀 진정해 주세요."
"아니. 내가 재 엄마인데 그것도 모르겠냐고요. 다들 아시잖아요. 아픈 애인데 그 말 믿고 내 남편이 뭐? 성범죄자? 이게 말이 되냐고 생각하냐고요."
엄마다. 엄마가 왜? 그리고 이게 뭔 소리야? 홀린 듯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누나와 엄마, 그리고 아빠가 분리되어 있었다. 당황하는 여섯 눈동자가 나를 쳐다본다.
"너는 왜 여기와 있어?"
"뭔데? 뭔데 이 난리인데?"
"너는 알 거 없어. 빨리 집에 가."
"아니 밖에 다 들려. 그게 뭔 말이냐고. 야. 너 아빠 신고했어? 진짜 미친 거야? 구라도 적당히 해야지. 아니 왜 적당히를 모르고 지랄인데 시발. 아니 미칠 거면 혼자 미칠 거지 왜 그렇게 우리 못 살게 구는데."
누나의 흔들리던 두 눈은 이내 눈물로 가득 찼다. 가득 찬 눈물이 너무 깊어서일까? 이내 눈이 멍해졌다. 멍해진 두 눈이 이윽고 향한 곳은 책상이었다. 쿵. 쿵하는 소리와 함께 누나의 머리에는 피가 솟구쳤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일까? 책상과 머리는 끊임없이 만났고 피는 사방으로 튀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달려들었을 때 누나를 멈출 수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미친년. 그냥 저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항상 뒤에 있던 정 소장이 나와서 사태를 수습한다.
"야 이 순경, 빨리 119 불러."
"저기 아버님, 일단 저희도 분리 절차가 있고 신고자분이 지금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으니깐 일단 귀가하세요. 어머님은 저희랑 같이 병원으로 가시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차에 올라탔다. 너무 혼란스러워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머리를 왜 박아서. 진짜 미쳤네. 그냥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병원으로 가는 건가? 피가 꽤 많이 나는 것 같은데. 하... 도대체 왜? 문득 왜 이런 소동이 일어났는지 생각이 든다. 아니지? 아니겠지? 운전석에 있는 아빠를 바라봤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엄마는 새벽이 되어야 집에 들어왔다. 안 자고 기다렸건만 돌아오는 말은 나중에 알려준다는 말뿐. 며칠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바빴다. 아빠는 경찰서는 엄마는 병원을, 그리고 둘이 같이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빠가 나를 불렀다.
"철수야, 누나가 많이 아프잖아. 그래서 정신병동에서 치료를 좀 받기로 했어."
"정신병원에 입원한 거야? 얼마나 입원하는 건데?"
"일단 3개월 정도? 더 입원이 필요한지는 의사랑 상담받고 정할 거 같아. 요 며칠 너도 고생했을 건데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근데 아빠."
"응?"
"아니지?"
"응?"
"누나가 했던 말... 아니지?"
"응 아니야."
마음에 응어리져있던 불안함이 사그라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한번 쏟아졌던 눈물은 그칠새를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아빠의 품, 그리고 온기가 전해진다. 그 후 나의 일상은 급격하게 회복이 되었다. 아니 더 좋았다. 더 이상 집에 언제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이나 수시로 오던 연락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 모습이 이상하다고 했지만 설명하진 않는다. 가족이니깐. 다른 가족들도 누나의 빈자리를 느끼지만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진 않았다. 가끔 술을 거하게 먹고 누나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빠의 슬픈 모습만 보일뿐. 우리는 잘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3달이 지났다. 3달이 지났지만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3달이 지나고 6달이 지났을 때 누나가 돌아왔다.
돌아온 누나의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몸이 많이 야위어서 돌아오긴 했지만 공격적이던 모습은 사라진 후였다. 집에 돌아온 후 누워서 자다가 밥을 먹고, 다시 누워서 자고를 반복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괜찮아 보인다는 점. 다시 가족이니깐 시간이 지나면 잘 지낼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여름 방학을 맞이해서 상철이와 템플 스테이를 가는 날이다. 처음에는 가기 싫다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나까지 신청했다나. 절에 왜 돈을 주고 가는지 정말. 짐을 싸고 있을 때 누나가 나를 불렀다. 집에 들어오고 난 후로 처음 나를 부르는 것이어서 흠칫 놀란다.
"철수야."
"응... 왜?"
"잘 갔다 오라고. 건강하게. 다치지 말고."
"갑자기 새삼스럽게 무슨 안부야. 다 컸고 절 가는데 다치겠어?"
"하긴 이제 다 컸으니깐. 잘 다녀와."
"응."
갑작스러운 대화에 놀라 아무 말이나 다 해버렸다. 가슴이 쿵쾅 뛰었다. 심장이 진정되자 다시금 예전 누나의 모습이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아파트 정문을 지날 때쯤 집을 돌아봤다. 베란다에 나와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인다. 손을 흔든다. 양양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낙산 버스 터미널로 거기서 버스를 타고 낙산사까지 장장 4시간에 걸친 여정을 끝내고 체크인을 했다. 1박 2일 자유일정이서 사찰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사찰 기념품 파는 곳에 들렸다. 이것저것 구경하다 조그마한 묵주 코너 앞에 섰다. ‘건강. 믿음’이라 적혀있는 문구가 보였다. 이 조그만 것이 2만 원이라니. 그래도 다시 돌아오고 있는 누나를 위해 하나 샀다. 저녁시간이 되고 밥을 먹은 뒤 스님과의 대화 시간에 참석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고민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스님은 휴가가 있는지 이런 것들이 궁금했는데 진지한 자신들의 고민들을 털어놓는 이들이 신기했고 나도 모르게 그 얘기들에 매료되었다. 마칠 때쯤 스님이 말했다.
어떤 큰 스님이 저한테 말씀하시더라고요. 네가 알고 있는 사실 중에 진짜로 그게 맞는 게 얼마나 되겠냐? 네가 진실을 믿고 있는 게 아니고, 믿고 싶은 가짜들을 골라서 믿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네가 틀렸어 이렇게 바라보지 말고 다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해. 여러분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너무 다 틀리고 내 말이 맞다고 하지 말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내가 알고 있는 게 진짜가 아닐 수도 있으니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나도 누나를 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오늘 산 묵주 주면서 내일부터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야겠다 다짐했다. 끝내주는 일출을 보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장장 5시간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나도 어디 갔는지 집에 없었다. 사준 묵주를 책상에 올려놓을까? 오면 직접 줄까? 고민이 들었다. 선물은 서프라이즈지 하며 누나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묵주만 거기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그 아래로 곰돌이 푸 수첩이 보였다. 내가 중학교 시절 사준 수첩인데 아직도 갖고 있다니.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수첩을 열었다.
수첩 내용은 별거 없었다. 중학교 시절 썸 타던 오빠 찬양 글. 아이돌 찬양 글. 그러다가 망친 시험에 대한 일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웃겼다. 매일 쓰던 글들은 5월부터 없어졌다. 빈 페이지가 하나둘씩 늘어갔다. 여기까지 쓰고 안 썼구먼. 닫으려고 하던 찰나. 뒷 페이지쯤에 글이 쓰여있는 것을 봤다.
동생에게도 똑같이 한다고 말했다. 내가 지켜야 한다.
글은 얼마나 힘을 줘서 썼는지 한 문장에서도 연필의 힘이 느껴졌다. 무슨 소리지. 몇 페이지 더 넘기니. 다시 글자가 보였다.
엄마한테 말했다. 내 엄마가 맞는 걸까? 얘기 도중에 동생이 들어왔다. 엄마랑 아빠랑 편 먹고 동생한테 그러면 어쩌지? 내가 강해져야 한다. 이겨내야 한다. 지켜야지.
종이가 눈물 자국으로 잔뜩 울어있다. 서랍을 더 뒤졌다. 중학교 시절 수첩부터 심지어 최근까지 쓴 공책들에도 눈물이 맺혀있는 페이지들이 가득했다.
아빠가 다시 방에 들어왔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 약해지며 안된다.
일어나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어디 간 거야. 가슴이 뛰었다. 그 순간 집 전화가 울렸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 다급하게 뭐라 소리쳤고, 이내 착잡한 소리로 누나가 떠났음을 알렸다. 누나가 나를 지키려고 희생하고 있었을 때 나는 그것을 몰랐고, 떠났을 때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편하고 믿고 싶은 쪽으로 믿었고 진실을 외면했다. 진실을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누나는 견디고 견디고, 견디다 나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