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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Jun 26. 2024

무중력, 늦잠 그리고 새벽(3)

윤상의 새벽

불안을 끊으려고 노력한 지 며칠 새벽이 지났는지 모른다. 새로운 일(지금은 슬픔과 불안을 멈추는 일)이라는 조건식을 삶에 적용시키고 조건식의 결과가 참일 동안 반복적으로 실행하는 일에서 탈출하는데 며칠 새벽이 지났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조건식은 다음과 같았다.


평온 = 1;

슬픔(혹은 불안) = 5;


while(평온 < 슬픔)

{

   println("슬프거나 불안한 상태가 %d 번째 반복 중입니다.");

    i++;

}

    println("슬픔과 불안이 멈추고, 평온한 상태입니다.");


개떡 같은 식으로 다행히 밥 벌어먹고사는 삶이 아니기에 흉내만 내 보았다. 위의 조건식은 그냥 단순히 영감거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잿빛거리 위엔 아직 남은 어둠이 아쉬운 한숨을 여기 남겨둔 채 지루했던 침묵은 깨어지고 눈을 뜬 하루,라며 윤상은 새벽이라는 노래에서 중얼거린다. 오전 12시 10분. 방 안의 모든 불빛은 다 꺼두었다.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불빛만이 남아있다. 섬세한 붉은빛. 세상 모든 소리가 멈춘 새벽에 초가을 메마른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듯 방에서는 한 모금 한 모금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린다. 구수한 냄새와 함께.


한모금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다음에 크게 내쉰다. 5번째 반복 후에는 섬세했던 담배의 붉은빛은 꺼지고, 고요함만 남는다. 평온한 상태가 찾아온다. 그렇게 며칠 새벽을 보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이 시간 때 슬픔과 불안이 멈추고, 평온한 상태가 금세 나를 반기는 듯하다. 방구석으로 가기 전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쉰 상태, 슬프거나 불안한 상태가 몇 시간 동안 반복되고 있었다.


평온한 상태는 간사하게도 8시간이 지나면 지루한 상태로 상전이 되는데, 지루했던 침묵은 요즘 오전 8시 20분 즈음에 자연스레 깨어진다. 눈을 뜬 하루에 감사를 전하고 Donald Byrd의 Where Are We Going을 흥얼거린다. 구수한 사람 냄새 가득한 방구석 공기를 빼내는 작업과 동시에 몸을 욕조 안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밀어 넣는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도 하며, 맞기도 하는 일은 여전히 좋다.


Donald Byrd의 트럼펫 연주는 머리칼을 말리기 전까지 잘도 들린다. 뿌뿌뿌. 신이 났다. 물론 듣는 내가 말이다. 그도 신이 났으면 더욱 좋겠지만. 365일 내내 선크림은 500원 동전 크기만큼 듬뿍 안면에 문질러 준다. 머리칼이 조금 길기에 머리띠를 두른 채. 듬성듬성 눈썹칼로 눈썹도 정리해 준다. 갈매기와도 같다. 조금의 콤플렉스이긴 하지만 나름 신경을 쓴 듯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사랑해 주는 습관 중 하나다.


머리칼을 말릴 때가 왔다. 헤어 드라이기 소리 때문인지, 머리 손질이 어려워서 그런지 늘 긴장이 된다. 긴장은 5분 넘게 지속되기에 슬픔과 불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합의를 본다. 괜찮냐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에 묻고 괜찮다고 답한다. 밖으로 부리나케 뛰쳐나간다. 오늘도 역시 신발을 신는 데까지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주어진 미션을 깨며 살아가는 것도 이제는 나쁘지 않다.


오전 9시 40분 냉장고 아래에 주저앉아있다. Art Blakey & The Jazz Messengers의 Like Someone In Love 볼륨을 내 울음소리보다 더 크게 틀어 놓은 채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속이 미친 듯이 후련했다. 슬펐다. 불안했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괴롭혔다. 싫다고 말했음에도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그대들로 인해 괴로웠다. 이유가 있었다. 드디어. 늘 행복한 줄 알았다. 행복한 척을 했던 것이었고, 행복하려고 노력했다.


이번엔 달랐다. 분명한 이유가 없었던 지난 과거와는 달랐다. 관계를 끊어내기 시작했고, 확실하게 말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나는 고집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싫은 거였다. 나도 날 함부로 하지 않는데, 누군가 날 함부로 한다는 걸 알고 난 뒤 괴로웠던 것이다. 이런 시간이 있어서 덕분에 내 사랑의 타이밍은 한 발짝 더 멀어져만 갔다. 덕분에 고맙다. 관계를 끊어내게 해 주어 고맙다. 나는 슬프고 불안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잿빛거리 위엔 아직 남은 어둠이 아쉬운 한숨을 여기 남겨둔 채 지루했던 침묵은 깨어지고 눈을 뜬 하루 뒤 윤종신의 늦잠을 들으며 혹은 김해솔의 무중력을 들으며 나를 사랑하는 나에게, 그리고 다가오는 나를 사랑하는 그대와 평온한 상태를 함께 하기를 바란다. 너의 몸짓 그 눈빛 그 속삭임 그 눈물 나는 너 너는 나. 약속 하나만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슬픔과 불안에 관하여 끄적이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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