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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권력의 정점에 선, 검색 포털

양주와 Bar의 시대

by 까칠한 펜촉 Mar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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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검색 포털의 패러다임


2000년대 초반 검색 포털의 패러다임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검색 기술의 상향 평준화 → 콘텐츠 중요성 부각

네이버와 한게임의 합병 → 검색+게임 중심 포털 모델 확산

포털의 미디어 권력화 → 지식서비스와 블로그 중심 Web 2.0의 점화


이 시기, '네이버, 다음, 야후, 엠파스, 파란(KTH)'은 5대 포털로 군웅할거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야후가 압도적인 1위를 지켰지만, 검색 기술이 색인 기반에서 자연어 기반 콘텐츠 검색으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네이버와 다음이 빠르게 상위권을 장악하게 된다.

 



검색 포털, '문(Portal)'의 역할


인터넷에 대한 개념이 아직 희박하고, 정보 비대칭이 극심했던 시기. 검색 포털은 말 그대로 ‘웹(Web)’으로 연결된 세계로 가는 문(Portal)의 역할을 했다.


국내 포털과 구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메인 페이지의 UI였다. 구글은 심플한 검색창 하나로 구성된 반면, 국내 포털은 뉴스, 미디어 콘텐츠, 검색 광고, 제휴 콘텐츠 등 다양한 정보를 전면에 노출시키려 했다.
이는 검색 기술이 평준화되면서, 기술 중심에서 콘텐츠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포털의 메인 페이지는 유입 사용자 수(Unique Visitor)와 페이지 뷰(Page View)가 높은 ‘매체’로 기능했으며, 이는 곧 광고 매출의 핵심 자산이었다.




엠파스, 메인 페이지의 위력


2003년 무렵 엠파스의 메인 페이지는 일일 방문자 수가 500~600만 명, 페이지 뷰는 1,000만을 넘었다.
CPM(1000회 노출당 광고 수익)을 2,000원으로 가정하면, 메인 페이지 배너 광고만으로도 일 매출이 2천만 원, 월 6억 원에 달했다.

이것이 바로 ‘검색 포털 메인 페이지’의 힘이었다.


엠파스 재직 기간 중 약 7~8개월 간, 엠파스 메인 페이지 관리를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제휴서비스 일부 영역을 담당하다가 얼마 안 있어 전체를 담당하게 됐다. 본래 메인 페이지 관리는 '한성숙 본부장님(이후, 네이버로 이직 하셔서 대표이사까지 엮임하신)'이 직접하셨는데 워낙 바쁘시다 보니 콘텐츠가 제때 업데이트 안되거나 오탈자 발생, 링크 오류 등을 자주 하신 탓에 A 영역, B 영역, C 영역이 시나브로 내 관리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재밌고 임펙트 있는 카피를 나름 잘 뽑는다는 칭찬도 영향을 주었을테고.)


포털의 메인 페이지의 관리 담당이란 건 정말이지 엄청난 권력이다.

게다가 제휴 서비스를 맡고 있다보니 내 서비스의 매출이나 트래픽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아니라, 다른 부문의 서비스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 금요일 오후가 되면 늘 '커피, 사탕, 과자, 초콜릿 등'이 포스트잇과 함께 한아름 자리에 쌓여있었다.  




땅짚고 헤엄치기 같았던 제휴 사업


나는 2002년 12월 엠파스 제휴비즈니스팀에 입사했고, 2006년 검색콘텐츠1팀의 팀장이 되었다.

제휴비즈니스팀의 핵심 업무는 60여 개 제휴 서비스(금융, 교육, 생활, 엔터테인먼트 등)를 기획하고, 전문 회사를 입점시켜 운영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초기 제휴 서비스는 상단 헤더만 엠파스가 관리하고, 콘텐츠는 제휴사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구조였다. 엠파스는 입점비로 수익을 올리고, 제휴사는 검색 포털 지면을 통해 고객 유입을 유도하는 윈윈 구조였다.


입점사는 많을 땐 120개, 금융 서비스만 따져도 10~15개가 넘었다.

검색 포털은 유입 트래픽이 압도적이었기에, 온라인 마케팅 효과가 뛰어났고 실제 사용자 확보도 가능했다. 그래서 많은 업체들이 웃돈을 주고라도 입점하려 했다. 덕분에, 일부 담당자들은 입점비를 빌미로 업체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포털과 언론의 미묘한 관계


이렇게 입점하는 업체들 중에는 언론사 미디어도 있었다.

이들은 제휴사업팀보다는 뉴스팀 혹은 미디어팀으로 불리는 부서와 협력을 했는데 언론사는 콘텐츠 생산과 공급을 포털은 사용자 확보와 뉴스 콘텐츠 소비의 역할을 각각 분리하였다. 매우 평화로운 공존처럼 보이지만 언론사는 언론사대로 나름 뉴스 포털의 성격을 띠면서 검색 외 콘텐츠 서비스를 입점시켜 미디어 포털로의 성장을 목표로 하고, 포털은 자체 뉴스팀 혹은 미디어팀을 통해 언론의 역할을 하려는 꿍꿍이를 암암리에 부리기도 했다. 아마도 지금처럼 개나 소나 인터넷 언론사를 꾸려 사업화하는 게 쉬었다면 모든 포털은 아마도 미디어 사업에 보다 공격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신문과 잡지 같은 전통 매체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고, 인쇄 신문을 보는 것이 지성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포털과 언론은 적절히 공존하는 듯 보였지만, 뉴스 소비량이 폭증하고 콘텐츠의 진위 논란이 이어지면서 관계는 변화하게 된다. 언론사는 콘텐츠 제공자가 아닌 '비용을 받는 주체'로 변화하려 했고, 포털도 콘텐츠 자체 생산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다음 커뮤니케이션의 전략과 집단지성


다음이 상위권에 올랐던 핵심은 한메일과 카페를 통한 충성고객이었다.
무엇보다 카페 콘텐츠가 검색 콘텐츠로 활용되며 질적·양적 검색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 강점이었다(카페지기들에게 원성을 많이 샀지만). 이는 훗날 집단지성, 사용자 창작 콘텐츠(UCC) 중심의 Web2.0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관점이 있어야 향후, 집단지성, 사용자 창작 콘텐츠(UCC)를 중심으로 검색 콘텐츠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 검색 포털의 전략적 태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털, 미디어로서 발전과 게임 사업의 교훈


많은 검색 포털들이 이 2000년대 초반에 미디어사로서의 발돋움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Two Track으로 공략했던 전략 중 하나가 캐주얼 게임의 사업인데, 지금 되짚어보면 결과적으로 네이버와 한게임의 결합을 맥목적으로 벤치마킹한 결과였을 뿐이지 전략적 검토는 크게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왜냐면, 게임 산업이란 건 영화 산업과 같이 '투자, 개발, 배급'이라는 명확한 벨류 체인을 갖고 있는데, 검색 포털의 게임 사업부는 이런 벨류 체인 상의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마땅하고도 명확하게 역할을 정하지 않은 채 이것저것 손대다가 결과적으로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실패 사례 중 하나가 엠파스 게임 사업인데 게임 사업에는 아무런 경험과 역량이 없는 리더들을 앞에 세워 놓고는 신규 채용인력만 60 ~ 70명 배치해 놨으니 사업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이 주제로 글을 쓰려니 정말 재밌는 추억이 많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없는 애기만 짚게 된다.


그렇게 영향력 많았던 검색 포털들 중 이제 남은 것은 네이버와 다음 커뮤니케이션 둘 뿐인데, 이 중에 다음 커뮤니케이션마저도 매각 후에 행보가 뻔한지라 이 글을 쓰면서도 기분이 씁쓸하기만 하다.


참 좋았던 2000년대.


우리의 청춘과 열정이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

단, 하루만이라도 돌아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까칠한 펜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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