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나희 10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선호 Oct 29. 2024

하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출발합시다.” 나희가 앞장선다. 늘어진 리기다소나무 가지를 들어 올리고 산비장이, 구절초, 범부채를 밟으며 길 없는 산중에 길을 내며 걸어간다. 바지에 붙은 풀씨들을 건성으로 털어내며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해도 뜨기 전에 길도 없는 길을 귀욤이 잘 내려갈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면 베스트….” 중얼거린다.

  잠시 멈춘 나희는 뒤돌아 세 사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한다. 김영우의 운동화가 하얗다. 

  해 떴을 때 일어나 김영우의 저 운동화를 처음 봤을 때 나희는 어깨가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욕을 먹은 게 자신인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욕을 들은 적 많았고 맞아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험이 쌓인다고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보호막이 아무것도 없는 나희에게는 폭력의 어떤 기미가 민감하게 거슬린다. 민감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없어진 사람들을 찾는다고 우왕좌왕하는 동안에도 나희는 김영우를 계속 의식했다. 

  그가 다가온다.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 싶게 다가온다. 숨을 들이쉬고 있는지 내쉬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햇빛 아래 얼굴이 밤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앳되다. 눈이 마주치자 나희는 뭐라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벌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는다. 물어볼 수 있는 말이 없다. 귀욤을 모르는데 귀욤 대신 뭐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때 김영우가 먼저 말을 한다.

  “들었어요?”

  나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못 들은 척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귀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다. 귀욤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몰라도 떳떳하게 따지지 않은 걸 보면 김영우 또한 잘못이 있을 거라고, 나희는 짐작한다. 서로 잘못이 있다고 하면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욕설을 퍼부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것도 숲속에서 지붕도 벽도 없이 자고 있는 틈을 타서. 

  “다 들었어요?”

  “네.”

  나희가 부지런히 소나무 가지를 치우고 우거진 수풀을 헤집는다. 내리막길이다. 꿀벌과 제스의 걸음에 속도가 더 붙는다. 김영우가 나희 곁에 더 바짝 붙는다.

  “다 들었다면, 뭐, 어쨌든 죄송해요. 듣길 바라긴 했는데 그게 다 들리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네, 알아요.”

  “이모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알지만 실컷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후련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다니. 후련하다는 말인가? 간밤의 욕설이 떠오르면서 나희는 소름이 끼친다. 김영우의 앳된 얼굴은 무심해서 평화로워 보일 정도다. 나희는 다시 근육이 뭉치며 어깨가 굳는 것을 느낀다.

  “귀욤 님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는 데 있어요?” 나희가 김영우에게 묻는다. 

  김영우가 얼굴을 찡그린다. “왜 자꾸 다른 말 하고 존댓말하고 그래요?” 

  “네?” 나희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김영우를 마주 본다.

  김영우가 짜증스럽게 말한다. “가희 이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전 09화 이탈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