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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03. 2019

애들 때문에 참는단 말이 아팠어요.

나는 애들은 안중에 없는 나쁜 엄마라는 말이니,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페미니즘 얘기가 나왔다.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의견을 나누던 중, 나는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모임 중에 한 명이 자신의 지인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지만 애들 때문에 덮고 살더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발끈하는 나를 발견. 그 말은 나에게 애들은 신경 안 쓰는 무정한 엄마라는 비난으로 들렸다. 아직 난 멀었나 보다.


 내가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고민할 때, 나에게 던진 질문은 딱 하나였다. 참는 것이 아이를 위한 것인가 안 참는 게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나도 아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한 사람인데 "애들 때문에 살아요"라는 말로 나를 무참하게 만들면 너무 억울하다.


외도한 남편이 용서가 안되어 괴로워했던 날들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이다. 외도 후에도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경상도 남편의 태도를 버리지 않은 전남편을, 어머니의 맘으로 품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이기적인 여자가 된 것이다. 속으로 문드러져도 애들한테는 겉보기 멀쩡한 가정을 지켜 줘야 옳았나 보다. 하는 수없이 들어온 논리들이 주르르 지나갔다.  '애들 때문에 참고 사는 여자'가 되지 못한 나는 작아지고 말았다.


발끈하는 나를 달래려 독서모임 회원은 지인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참고 산다는 지인은 어려서 부모님 모두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고 한다. 부모가 없는 설움을 너무나 잘 알기에 참을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아직도 발끈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예전에 바느질 공방을 하던 시절 한 손님이 있었다. 남편이 지역의 꽤나 유명한 예술인이었고 그분의 작품을 개인전에서 몇 점 샀다.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예술가의 사모님과 전시회장에서 친분을 맺었고, 작업실로 가서도 작품을 산 적이 있다. 나중에 사모님이 내 바느질 공방으로 놀러를 오셨다. 이런저런 얘기하며 이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사정은 이미 깠으니 그 사모님은 편안했나 보. 이혼은 대체 어디서 하냐고 물어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긴 머리에 긴 수염을 가진 멋있는 외모, 법정스님 같은 얘기만 하던 남편 예술가는 참으로 이기적인 구두쇠였다. 경제권을 전혀 주지 않고, 혼자 비싼 옷에 해외여행에, 세미나 다닌다고 했다. 사모님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따로 알바를 하는 지경이라고 했다. 그나마도 전시회 오프닝 행사나, 명사로 초대되는 행사 는 일을 못 가게 되니 경제적으로는 더 궁핍하다고 했다.


내가 사모님보다 더 흥분을 해서, 애들이 대학을 가도록 어떻게 살았냐고 눈물을 훔쳤다. 그 사모님이 이혼하려면 무슨 서류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법률 구조 공단에 가서 상담을 받아 보자 하고, 대신 예약을 해 줬다. 예약한 당일에 혼자 가기 무섭다고 내 공방으로 왔다. 나는 내가 운전을 해서 법률 구조공단까지 같이 갔다. 법률구조 공단에서 들은 얘기로는 사모님의 사정이 너무 딱하고, 본인 명의로 된 재산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국선 변호인도 선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를 했다.


희망차게 나와서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 다른 팀으로 온 손님들이 그 사모님을 알아보고 '사모님, 사모님' 하며 모두 다 인사를 하는 것이다. 식당 사장님 내외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 사모님의 태도가 살짝 바뀌는 느낌이었다. 식당의 손님으로 온 다른 일행들은 나와 그 사모님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이 사모님이 듣보잡 젊은애랑 왜 밥을 먹을까?' 이런 느낌? 구석자리에 숨다시피 나를 데려가는데,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어찌어찌 밥을 먹고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분을 잊고 내 생활을 하던 중 1년쯤 지나서였다. 예술인 남편분의 개인전 현수막이 붙은 걸 보았다. 나는 그 부부 근황이 궁금했지만 전화를 해서 이혼은 하셨냐 물을 수없었, 전시회 날을 기다렸다. 오프닝을 하는 날 가 보니, 여전히 고운 한복을 입고 사모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았다.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하니, 내 손을 잡으며 "애들 때문에 참고 살기로 했어요." 했다.


사모님은 그 후 나를 공식적인 자리에선 반갑게 인사를 했고, 사적으로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페북이나 블로그로 늘 궁금해하며 안부를 물어 봐 주신다. 참고 사는 모습도 안쓰럽고 그렇다고 이혼하라고 부추길 수도 없고 나로서는 그저 행복하려니, 남편분이 개과천선을 했겠거니 믿는 게 속이 편했다. 사실 그 후로 예술가 남편분의 작품도 정뚝떨이었다.


독서 모임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그 사모님이 생각났다. 그래, 그분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게 있었겠지. 내가 어찌 감히 뭐가 옳다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싶다가도, 그래도 더 옳고 덜 옳은 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우리 엄마도 이혼 사유야 넘치고 넘쳤지만 참고 살았기에 비교적 안락하게 자랄 수 있었다. 엄마에게 감사하지만, 참고 산 대가로 엄마는 암에 걸렸고 일찍 돌아가셨다. 그럼 안 참았어야 옳았는지도 모른다.


참고사는 사람의 개인적 성장 배경, 경제적 상황이 다 다르니 '옳음'은 사연마다 다른 것이다.  개별적 특수사항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못 참고 이혼을 선택한 사람도 또한 그 사유마다 다른 '옳음'이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연이 다르니 이해하는 방향도 달라야 한다는 걸 이제야 배웠다. 이제 '자식 때문에 참고 살아요'라는 말에 덜 아플 것 같다.


늦가을 낙엽처럼 곱게, 초겨울 공기처럼 매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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