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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Apr 03. 2020

힐링으로 경쟁하니 진짜 힐링이 필요해

나만 빼고 다 행복한 거야?

 같이 근무를 하는 한 선생님이 불쑥 물어 왔다. 남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나 혼자만 불행하다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 빼고 다 행복해 보이는 감정이라, 그건 오랫동안 내 전문이었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며 살까? 직장에서, 친척들 모임에서, 취미 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이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고, 온라인으로 들어가면 인스타나 지역 카페에서, 아는 것도 아닌데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모니터 너머의 사람들을 만난다.  


직장이나 가족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보아 왔고 앞으로도 볼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내 마음속의 힘든 얘기를 얼마나 풀어놓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거의 없는 것 같다. 부모나 형제라 해도 내가 겪는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는 단 한 명을 만들기 힘들다. 하물며 직장이나 이웃 중에서 속 얘기까지 털어놓을 사람을 찾는다면, 산삼을 찾는 심마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스타나 페북에는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이 올린, 이국적인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거나 야자수가 출렁이는 바닷가를 걷는 사진들이 넘친다. 그런 사진을 보면 갑자기 나는 뭐하고 사나 싶어 진다. 경기가 어렵다는 뉴스는 항상 나오건만 인스타에 올라오는 사진들만 보면 호황도 그런 호황이 없어 보인다. 그럴 때 우울감이 밀려와 괜한 소비를 하기도 한다.


인스타나 페북, 하다 못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사진을 거기에다 올려놓을까? 당연히 자신이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내놓을 것이다. 집에 손님이 오면 집안을 치우고 안 쓰던 그릇에 과일도 깎아 낸다. 옆집 아줌마라 해도 우리 집의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자고 일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건 싫을 것이다. 누군가 내 공간을 방문하는 것도 신경을 쓰면서 평소보다 조금은 나아 보이길 원한다. 하물며 나의 모습을 세상에 내놓는 상당히 적극적인 노출에 있어 ‘보정’과 ‘컨셉’이 없을 리가 없다. '컨셉'이 있고 '보정'을 거친 한 순간이 그 사람의 전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우리가 기웃거리는 남의 행복은 그 사람의 최대치로 행복한 삶의 한 모습이다. 그런 삶의 순간이 나에게는 없었을까? 분명히 있었을 텐데 내 것은 하찮게 여기고 남의 순간은 대단해 보이니 우울해지는 것이다. 나의 설정된 사진에 누군가는 부러워하고 주눅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주눅 들었다는 얘기를 하기 싫어한다. 속으로는 부러워하거나 시기를 해도 겉으로는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살짝 디스를 해서 자신의 평강을 유지한다.


예전에 내가 남편과 재혼을 망설이며 고민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카카오톡 친구의 프로필에 있는 커플들의 사진이 보기가 싫었다. 특히나 외국인과 결혼한 몇몇 지인의 행복한 모습은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숨김’ 카테고리에 옮겨 놓기도 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진 누군가를 보아줄 아량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때 못해본 내 한을 풀기 위해서 인지 지금은 남편과 찍은 사진을 프로필에 걸어 놓는다. 딸과 찍은 사진을 대문에 걸어 놓지 않아 딸이 서운해할 정도이지만 당분간은 ‘남편 가진’ 유세를 좀 부리고 싶다.


누군가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을 수도 있고 웃길 수도 있다. 50이 다 된 아줌마가 남편과 찍은 사진을 올리는 게 얼마나 오글거리는지 알지만, 내 컨셉이다.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나의 ‘남편 부심’인 것이다. 남편 흉도 자랑으로 들리던 내 14년 이혼녀 생활에 대한 보상이다.


SNS에 보이는 남들의 행복해 보이는 사진에 주눅 들면, 나를 설득시킨다. 내가 보여주는 ‘남편 부심’을 그대로 이입해 보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런 걸 해 보고 싶었구나, 하는 마음이다. 음식 사진을 보면, 유명한 맛집의 파스타를 먹어 보고 싶었구나. 상장 사진에는, 아이가 상을 받은 게 자랑스러웠구나. 뮤지컬 티켓 사진을 보면, 남자 친구와 공연을 본 게 행복했었구나. 이렇게 그 사람의 ‘소망’과 ‘충족’을 공감해 보면, ‘그랬구나 좋았겠다’라는 감정에서 멈춘다.  ‘나는 뭐지’하는 자책의 감정까지 잘 안 간다. SNS를 보며 나만 빼고 남들이 다 행복해 보일 때 내가 쓰는 방법이다.


한 달 동안 학원이 휴강을 해서 집콕의 시간을 가졌다. 사회적으로 전쟁 같은 난리이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눈만 뜨면 소처럼 일하러 나가던 내 팔자에, 참으로 호사스러운 휴가였다. 매일 오전 동네 뒷산을 두 시간씩 오르고 오후에는 낮잠과 독서, 넷플릭스로 보냈다. 팝콘 옥수수처럼 딴딴하던 진달래 망우리가 부풀어 올라 분홍색 팝콘처럼 터지는 과정을 오감으로 관찰했다.


한 달의 시간이 왜 이리 감사하고 달콤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만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집에만 있어야 하고 심지어 여행사진이나 외식 사진에는 비난까지 당하는 상황이다. 연휴나 방학 때 주변 사람들의 여행사진이 ‘행복 경쟁’을 하듯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재난 상황은 고요하게 나와 내 가족만 들여다보는 기간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남의 행복에 조바심을 내며 행복 연출을 했는지를 반성했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인다고 불평을 하던 선생님에게, 남들도 그만큼의 고민과 속상한 일은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힘든 일도 말을 좀 해 주면 자기가 덜 속상할 것 같다며, 나보고 고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남편과 ‘남매’가 되어가는 게 가장 슬프고 속상한 일이라고 했다. 늘어가는 약봉지를 보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서글프다고 알려주었다. 옆에 있  20대 원어민 선생님이 자기는 개 두 마리와 산다며 그래도 사람이 낫지 않냐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불평을 하던 선생님은,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며 끝내 자기 얘기는 하지 않았다.


결국, 남의 불행에 위안 삼아 행복을 찾는 것도 힘들다. 남의 불행은 하찮아 보이고 자기 고민만 더 크게 느껴지니 위안이 안된다. 자기가 가진 고민이 눈을 가려, 내가 가진 많은 혜택들을 못보게 한다. 내 안에서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찾아내는 눈이 필요하다. 남과 행복 경쟁을 할 것이 아니라 나의 경쟁심을 버려야 했다.



제비꽃은 옆의 질경이와 경쟁하지 않고  자기 색대로  피어나는 것이  할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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