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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May 22. 2020

열등감은 잘난 척의 다른 이름


30대에서 40대로 넘어  때 심란한 기분은 누구나 느낀다. 앞자리 수가 바뀔 때 서글퍼지는 맘은 이해가 되지만, 지나친 호들갑은 우스꽝스럽다. 내가 40대가 될 때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뭐든 꿈꿀 수 있는’ 한창때인데, 그때는 노인이 다 된 것 같았다. 내가 40대가 된다는 게 믿어지냐고, 당시 만나고 있던, 현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진즉에 무려 50대가 되었다는 말로 내 호들갑을 무색하게 했다. 남편의 50대는 별일이냐 싶었다. 남들이 나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똑같은 일이 나에게도 오니, 마치 나는 그런 일을 겪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요란을 떨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가소로워했다.


 친구들보다 일찍 결혼을 했고 이혼도 일찍 했다. 아이들 사춘기도 일찍 겪었다. 엄마를 잃는 것도 남보다 빨라서 나의 젊은 날은 힘껏 견디는 날들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찾아와서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더 힘든 나를 보며 위로를 받고 싶어 했었던 것이다. 자기들이 겪는 것은 나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고 안심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던 중에 친구를 길에서 만났다. 그 친구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친정으로 내려와 이혼 준비를 한다고 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했고 엄마의 장례식장까지 오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자기의 이혼 결심 배경들을 얘기하며 훌쩍거렸다. 친구 엄마 장례식에 와서 자기의 불행을 얘기하며 우는 친구를 내가 달래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엄마를 잃은 내 슬픔은 온데간데없고 이혼을 결심한 친구의 서러움이 더 커졌다. 한참 울고 난 친구는 민망했던지 한마디를 던졌다. “친구 엄마 장례식에서 이 정도는 울어줘야지.”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그 친구는 지금도 잘 사는 것 같다. 이혼을 결심할 만큼 힘든 사연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시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길 때 헬기를 동원했다는 사연이다. 자랑인지 흉인지 모를 불만을 털어놓고 위로를 가져갔다. 그 친구가 지키고 싶었던, 행복해 보이는 가정 유지를 나는 포기했다. 자유롭지만 고단한 삶을 사는 내 모습에,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안심하는 듯했다.


  내가 힘든 일들을 겪을 때 나를 위로한 친구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많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나보다 늦게 아이의 사춘기를 겪은 친구가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중학교를 쉬고 고등학교를 휴학을 할 때  마음고생을 했다. 나중에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 것 나도 놀라고 친구들도 놀랐다. 한 친구의 아이가 고등학교 때 휴학을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저 공부에 의미를 못 찾는 아이라면, 한 해 쉬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정신 착란을 일으켰다. 아이가 1년 휴학을 한다는 게 그렇게도 큰일인지, 친구는 직장 사람 들과 친구들에게 피해망상까지 생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문자로 공격을 했다. 정신과 약을 먹고 겨우 진정이 되었다. 직장에서 입장이 난처해져서 정신과 의사의 소견을 첨부해서 위기를 넘겼다고 했다. 친구관계도 몇 년간 어색해졌다가 최근에야 회복이 되었다.


 옆집 아이는 공부를 좀 못해도 인사성이 바르면 칭찬을 한다. 내 아이는 인사도 잘하고 친구도 잘 사귀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내 아이들이 휴학을 할 때는 그럴 수 있다고, 길을 잘 찾아낼 거라고 위로를 했던 친구였다. 자기의 일이 되니 피해망상까지 생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니 나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 말은, 나는 그런 일을 겪을 수밖에 없거나 그럴만한 사람이고 자기는 그런 일이 올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마음 밑바닥에 자신이 우월하고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 친구가 있다. 내가 이혼 열등감에서 거의 벗어 날 즈음에 이혼을 한 친구였다. 이혼을 한 후 몇 년은 친구 관계, 가족관계가 재정리된다. 이혼한 것을 편안하게 얘기하기까지 거의 5년은 걸린 것 같다. 그 친구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업도 잘하고 있었고 사업 관련 공부도 열심히 하는 친구였다. 몇 년간 이혼한 사실을 주변에 계속 숨기면서 별거를 한다고 했다. 이해를 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렇게 속여 보니 너무 외로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고 거짓말의 범위를 기억해야 하니 피곤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말부부라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별거를 한다고 해 놨으니 나중에는 말이 꼬이기도 했다. 다 까고 나니 편안하게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사업상 어느 정도 숨기는 건 이해를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사석에서도 숨기고 포장하기를 거의 십 년이 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이혼한 사실이 그렇게도 수치스럽다면 남의 이혼은 얼마나 무시가 되었을까 싶었다. 이혼을 한 게 10년간 거짓말을 할 만큼 열등감을 가질 일이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말했다. 나는 공개를 해도 되지만 자신은 그럴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사생활을 공개해도 별 상관없는 푼수 때기 아줌마이고 자기는 그런 위치가 아니라는 말로 들렸다.


 지나친 열등감은 자신은 그런 일을 겪을 사람이 아니라는 우월감에서 온다는 것을 여러 번 느꼈다. 또한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에게 공감하기보다는 약간은 무시하는 것을 보았다. 무시하는 감정을 숨기기위해 비난을 하거나 피하기도 한다. 자기가 겪는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는 나와의 화해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마음이다. 나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나와 비슷해 보이는 남을 어떻게 ‘사심’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가?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을 하는 친구가 있다. 사소한 이야기에도 자기 설움에 눈물을 자주 흘린다. 아이가 있는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괴롭힌다.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인데 아이가 많은 사람을 보면 화를 냈다. “저런 환경의 사람도 하나님은 아이를 몇 명이나 주셨는데, 나는 뭐가 모자라서 아이 하나를 허락하지 않으실까?”라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좋은 환경을 제공할 자신도 없는데 아이를 낳는 사람은 죄를 짓는 일이라고 했다. 갑자기 나는 바늘방석이 되었다. 이혼을 하고 불안한 환경을 제공했으니  자격지심에 찔렸다. 모든 얘기를 아이가 없다는 자신의 불행으로 연결을 시켰다. 나중에는 내 얘기를 하기도 민망해졌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사소해 보이고 한 가지 부족한 점만 큰 불행으로 느끼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느라 자신에게 허락된 많은 축복을 놓쳐버리는 것이었다. 낭비되는 축복이 아깝게 느껴졌다. 남들이 부러워할 것들인데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 처지와 실수들에 대해 오랫동안 열등감, 수치심을 느껴왔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일에 주눅이 들었던가?  타고난 외모나 가정환경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 능력에 대한 열등감도 있다. 이 모든 열등감은 ‘우등’한 사람을 만나면 맥을 못 춘다. 세상 어디에나 나 보다 뛰어난 ‘우등’ 인간이 넘친다. 언제까지 열등감에 위축되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열등감을 달래가며 살 방도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이가 드는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주눅이 들 이유가 없다. 시험에 떨어지는 일, 연인과 헤어지는 일들은 자주 겪지는 않지만 몇 번은 겪는 일이다. 이것도 힘은 들겠지만 회복된다. 배우자가 죽거나 내 몸에 병이 생기는 일, 직업을 잃는 일도 큰일이다. 자식을 잃는 일도 종종 본다. 이런 아픔들을 겪어내느라 각자의 애를 끓이고 산다. 그 모든 슬픔들이 세상에 늘 있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겪을 뿐이다. 남들이 겪을 때 ‘사회현상’이던 일이 내가 겪으니 ‘청천벽력’이 된 것이다. 세상에 널려진 아픔에 내 아픔 하나 얹은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청천벽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냥을 하고 부족 간에 전쟁을 하던 시대에는 약점을 드러내면 생존에 불리했다. 약점을 숨기고 용맹함을 과시하며 생존을 해 왔다. 그때 배운대로, 태고 적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꽁꽁 숨기고 산다. 우리는 태어나서 걷는데도 1년이 걸린다. 밥숟갈을 제대로 입안에 넣는데도 몇 년이 걸린다. 송아지도 태어나서 물기만 마르면 뛰어다니건만, 인간은 유약해서 평 실수하고 다친다. 미약하니 우리는 ‘공감’이라는 특혜를 받았다. 내가 넘어져보니 깨진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내 아픔에 비교가 안 되는 아픔을 겪는 사람은, 내 아픔에 견주어 짐작도 할 수 있다. 아프고 힘들 때 이해받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미약한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이고, 미약한 인간 살 길이다.  


 내가 겪는 아픔에만 몰입하고 매몰되어 옆을 못 돌아본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자. 혹시 내가 교만 한 건 아닌지. 나는 이런 일을 겪을 사람이 아니라는 ‘잘난 척’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든 아픔은 끝내 보석처럼 빛날 날이 오리니, 지금 잘 견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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