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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Aug 13. 2021

‘예쁨’과 ‘날씬함’이 통화 가치가 된 세상에서

얼마나 예뻐지고 얼마나 날씬해질 것인가?




옷이나 가방, 신발이 담긴 택배 상자가 현관에 쌓이던 시절이 있었다. 휴일이면 동생과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돌며 차 뒷자석을 쇼핑백으로 채우며 하하호호 신이 났었다. 예쁜 몸을 만드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요가를 하고 그 몸에 맞는 예쁜 옷을 찾으려 해외 브랜드의 공홈을 매일 같이 둘러보기도 했다. 데이트도 여행도 예쁨이 빠지면 안 되었다. 예쁜 곳에서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사진을 남겨야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예쁨 정신'은 얼굴과 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쁜 가구와 예쁜 침구, 예쁜 소품과 예쁜 그릇으로 온 집안을 치장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못생긴 건 집에 가져 오지 마!" 라는 나의 경고에

"야 그럼 너부터 나가!" 라며 받아치는 동생의 장난이 웃겨 둘이 같이 깔깔거리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참 '예쁜 것'에 진심이었다. 진심을 넘어 '아름다움'에 지배 당하던 시절이었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나도 많이 변했다. 더 많이 좋아하는 것이 생겨서인지, 좀더 사는 법을 익혀서인지, 열정과 체력이 다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예쁨'에의 의지는 한풀 꺾였다. 여전히 옷을 좋아하고 꾸미기를 좋아하고 다소의 날씬함을 유지하려 애쓰기도 하지만 그것에 지배당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철이 변할 때 한 두 번 옷을 사고, 기분을 내고 싶은 날만 간헐적으로 화장을 한다. 돈을 꽤 들여 마음에 드는 가방이나 쥬얼리를 사기도 하고, 그릇이나 소품을 사기도 하지만 그것도 자주가 아닌 가끔이 되었다. 그 대신 사색과 감상에 쓸 시간을 사는 것에 돈을 쓰게 된다. 깊은 대화나 글쓰기에 열정을 쓰게 된다.


블랙핑크 멤버 '제니'를 참 좋아한다. 너무 예뻐서. 그 애는 내가 생각하는 외적인 예쁨과 매력의 응결체 같다.  인간 샤넬이라는 별명에 맞게 어린 나이임에도 럭셔리 브랜드의 옷을 척척 소화해 낸다. 너무 예쁘면 생김이 전형적이라 자기 색이 흐리기도 하던데, 그녀는 자기 색까지 진하다.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예쁨을 예쁘게 발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진다.


*사진 출처: 제니 공인


그런 걸 보면 나는 여전히 '예쁨'에 진심인 듯하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예술의 아름다움을 좇으며 그것을 향유하는 기쁨은 평생을 두고 포기 못할 일이다. 꽃이나 피아노를 다루는 취미 생활을 지속하는 것도, 소설가를 꿈꾸는 것도 결국은 그 아름다움의 궁극을 만들고 싶거나 즐기고 싶거나 그 속에 포함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것은 피로하다. 특히나 아름다움이란 것은 보이는 것에 일정 부분 치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본질적인 것이나 중요한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조차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산토리니의 일몰을 보며 사람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볼 때와 비슷하다. 어쩐지 아름다움을 진심을 다해 즐기기 보다는 그것을 담아서 또다시 보여주는 것에 종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늘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얼마만큼 아름다움에 영혼을 쓰는 것이 좋을까? 얼마나 예뻐지고 얼마나 날씬해질까?


오늘 아침 '그루잠'작가님의 글에서 나는 답을 찾았다. <헝거, 몸과 마음에 관한 고백>이라는 책의 리뷰였다. 작가님은 여성의 외모가 '통화가치'라고 표현하셨다. 결국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 '돈'과 유사한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의 돈을 벌 것인지 그러니까 돈을 버는 것에 얼마만큼의 인생을 쓸 것인지를 자기 사정 안에서 조율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의 가치를 높이 사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다소 업신여겨 멀리하고 (남들이 보기에는)불편한 삶을 감수하기도 할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통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얼마나 애를 써서 얼마만큼의 아름다움을 가질 것이냐는 본인의 자유인 것이다. 그것으로 인한 힘듦이나 불편 또한 자기의 몫이고. 그러하기에 그것에 대해 품평이나 가치 평가를 할 자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개개인에게는 '내 마음이다.'라는 자유가 필요하고 타인에게는 '그들의 마음이니 내가 평가할 자격이 없다'는 존중과 절제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넌 왜 화장을 안 해?"

"넌 왜 그리 몸매에 집착해?"


이런 시선이나 말은 불필요한 것이다. 좋으면 좋을 만큼 취하고 불필요하면 취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 좋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소리로 들리는 것이든 혹은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무형의 것이든. 예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내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여전히 예쁜 가을 옷에 마음이 흔들리고, 좋은 음악에 귀가 설렌다. 꽃을 만지며 마음이 환해지고, 예쁜 마음을 예쁘게 말하는 이를 보면 마음을 다해 꼬옥 안아주고 싶다.



'예쁨'을 온몸으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평생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름다움'의  궁극에 가 닿기 위해서는 소설쓰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예술가로 살아갈 멋진 날을 꿈꾸며, 언제까지고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 두고 만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비나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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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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