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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혜성 Nov 07. 2023

나는야 문맹자

우리 모두 문맹의 시절이 있다.

1.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나는 한글을 미처 떼지 못했고, 1학년 2반의 대표문맹자가 되었다. (그래도 시계는 볼 줄 아는 어린이였다.•_•v) 지금도 그렇지만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이 많아 대화의 내용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음~, 아~, 오~, 그건 그래 ‘ 따위의 추임새로 아는 척을 잘한다. 그때도 그랬다. 더군다나 나름 야무져 보이는 외모덕에 담임선생님도 나의 문맹소식을 늦게 아셨다.


2. “어머니, ㅇㅇ이가 겉으론 똑똑해 보이는데 아직 한글을 모르네요 “ 담임선생님은 학부모 모임에서 이 소식을 알렸다. 물론 엄마 외에도 여러 아이의 보호자가 자리했었다.


3. “반에서 ㅇㅇ이랑 ㅁㅁ이(문맹동지)만 한글을 못 뗐데~ 선생님이 ㅇㅇ이가 생긴 거랑 다르게 학습이 늦다고 걱정하더라고 호호“

“그래도 똑똑해 보이는 게 어디야~ 그건 타고나는 건데 하하“

그날 저녁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를 보며 나눈 부모님의 대화는 더 시트콤스러웠다. 우리 가족에게 내 문맹소식은 티비 속 ‘미달이’의 에피소드처럼 가벼웠다. 그때부터 한동안 집안에서 내 별명은 ‘미달이’였다.


4.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꽤 가방끈이 길다. 어찌어찌해 석사논문까지 쓰고 무사히 졸업했다. 그리고 전시서문을 쓰고, 기고도 해보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맞춤법은 아직도 헷갈리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대수롭지 않게 대하던 부모님의 반응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부모님은 조급해하는 대신 연필을 바르게 잡는 법이나 책을 가지런히 꽂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내가 글을 못 읽는 건 사건이 아니고, 지나갈 추억쯤으로 여겨주셨다.

연필은 아직 이상하게 잡고 책장에 책이 넘쳐 요상하게 쌓아두고 살지만, 지금의 나는 쓰고 읽는 걸 좋아한다. 대한민국 평균 독서량의 몇 배는 읽고, 대학생 때부터 꾸준히 십 년 넘게 일기도 쓰고 있다. 나는 ‘문자’보다 ‘문자를 대하는 자세‘를 배웠던 것 같다.


누구나 문맹의 시절은 있다. 그게 짧았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길었다고 해서 애처로운 일도 아니다. 자전거를 늦게 배운 사람이 사이클 선수가 될 수도 있고, 그림을 늦게 배운 사람이 화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글을 사랑하고 쓸 자세만 되어있다면, 나도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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