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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큐리 Feb 26. 2022

기수(汽水)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바닷물과 서로 섞이는 곳을 기수역(汽水域)이라고 한다.


한자 汽(기)는 아지랑이를 뜻한다. 물속에 들어가 보면 민물과 짠물이 서로 섞이며 마치 아지랑이처럼 보인다고 한다. 나는 이 어려운 한자를 10여 년 전쯤 업무 출장을 가서 알게 되었다. 2월 말, 봄이 턱 밑까지 올라온 때였다. 마음이 봄에 닿아 일찍 방비를 풀어서인지 남녘으로 내려갔는데도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당시의 나는 수산물 바이어였고, 유통량의 8할을 차지하는 통영의 굴에 더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돌며 고흥굴과 태안 깜장굴을 상품화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섬진강에서 벚꽃을 닮은 굴이 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때를 놓칠까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망덕포구 기수역의 굴은 먹거리로만 입에 넣기에는 사연이 참 많은 생물이었다.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는 섬진강 하구의 마지막 포구이다. 애기 섬 배알도를 사이에 두고 섬진강은 두 갈래로 나뉘어 바다에 뛰어든다. 한쪽은 남해섬으로 한쪽은 광양만으로 향하는데 애기 섬이어도 시야를 가리기에는 충분한 크기여서 강이 바다로 뛰어드는 장엄한 광경을 볼 만한 장소는 아니다. 이곳은 볼거리보다 먹거리가 장한 곳이다. 예로부터 망덕포구의 전어와 숭어는 맛이 좋기로 유명했고 양력 2월부터 3월 말까지 딱 두 달 동안에만 맛볼 수 있는 벚굴이 난다. 망덕의 달력을 헤아려 보면, 벚꽃이 한창 흐드러지는 짧은 때에 벚굴을 먹을 수 있고 봄이 한창일 때는 숭어, 여름에는 농어, 입추가 되면 전어가 올라오니 식도락으로 세월을 보낼만한 곳이다.

섬진강은 우리나라의 대형 하천 중 유일하게 하구둑이 존재하지 않아 기수역이 온전하게 보존된 곳이다. 광양만이 제철소로 가로막혀 이곳의 어부들은 횟집을 운영하거나 외지로 떠나기도 했지만 아지랑이 피어나는 기수에는 여전히 식도락의 재료들이 자란다. 벚굴은 그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다. 오직 섬진강의 기수역에서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온 해녀들이 채취 작업을 하느라 강바닥으로 내려가 보면 바위에 붙은 굴의 껍질이 마치 벚꽃처럼 보여서 벚꽃이라고도 하고, 벚꽃 필 무렵 먹는 굴이라서 벚굴이라고 부르기도 하다는데 딱히 답을 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벚굴은 찜이나 구이로 먹는데 그 고소한 풍미를 잊기 어려울 정도로 진하고 깊다. 진득하게 감겨오는 감칠맛에 빠지면 어른 손바닥만 한 굴 껍데기에 남은 국물까지 핥아먹을 정도로 심취하게 된다.


나는 요새 업무 상 접하는 '융합'이라는 용어를 들을 때마다 하이테크의 첨단 제품이 아니라, 섬진강의 벚굴이 떠오른다. 서로 섞여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기수에서 민물과 짠물이 어울려 만들어 낸 감칠맛을 떠올리다 보면 융합의 과정과 결과를 이보다 더 실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순수한 기준이 필요할 때가 있는가 하면, 과감하게 섞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가늠하는 것은 냉철하고 단호한 판단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섞는 데에는 과감한 접근과 넉넉한 관대함이 유용할 것이다. 판단하여 실행하는 과정에는 이렇게 다양한 품성과 자질이 요구되는 것이니 평소에 우리는 늘 유연해야 한다.


섬진강이 바다로 뛰어드는 장엄한 광경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저 상상해볼 뿐이다. 서로 맹렬하게 부딪히되 종국에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려 마치 꽃잎 흩날리듯 퍼져나갈 것이다. 장한 광경일 테니 꼭 한 번 보러 가고 싶다.


* 강이 하구에 이르러 바다로 뛰어든다는 표현은 김훈 작가의 문장입니다. 그 문장을 읽은 뒤로는 다른 표현이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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