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내옷을 입은 포자들 / 좀진고사리

(4화) 밍크 배내옷을 입은 작은 고사리

by 로데우스

포막 찾다가 양치식물의 자연사까지

배내옷을 입은 아기들이 바로 고사리 포자낭군

고사리를 공부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본다.


해산바가지는 나를 있게 한 뿌리


성남의 오래된 집을 수리하다 유물같은 해산바가지를 발견했다. 그 둥근 곡선 안에는 미역을 빨고 쌀을 씻던 할머니의 마음과, 미역국을 드시며 나를 품어내신 어머니의 사랑이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그 배내옷 같은 사랑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뿌리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문득 박완서 소설 『해산바가지』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잘생긴 해산바가지로 미역 빨고 쌀 씻고... 정성껏 산모의 건강과 아기의 명과 복을 비는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아름답던지."


그 진지한 아름다움이 이제야 내 마음의 굽이마다 되살아난다. 그것은 은퇴 후 낙상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고, 구구절절한 재활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산다는 것'의 희열과 생명의 엄중함을 몸소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5_bf6Ud018svcfkttcv9y1pmz_t7sgya.png AI가 그려준 나의 해산바가지 이야기


이 애틋한 시니어의 감수성을 일깨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제주에서 다가선 양치식물의 포막이었다. 포막이 뭔가 검색하다가 '양치식물 자연사'라는 책도 알게 되어 양치식물과 더 가깝게 다가갔다. 양치식물 중 좀진고사리에서 마주친 '포막(包膜)'은 흡사 배내옷을 입은 아기들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국어사전은 포막을 "홀씨주머니무리를 싸는 얇은 막"이라 건조하게 정의하지만, 내 눈에는 영락없는 아기의 배내옷으로 보였다.


포자라는 연약한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간절한 진화의 산물. 어떤 것은 털을 입고, 어떤 것은 가장자리를 잘게 나누며, 제각각의 모양과 재질로 생명을 감싸 안는다. 그 포막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고사리는 제 이름을 얻고 존재를 증명한다. 이름은 곧 소중한 생명의 지표이기에, 나는 고사리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며 그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다.



image.png 좀진고사리 포막은 배내옷을 닮았다.


때마침 3월의 강풍이 매섭다. 두꺼운 겉옷과 털모자로 무장한 채 산책길을 나서며, 갑작스러운 추위에 꽃대를 멈칫 세운 야생화들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 여린 것들을 감싸고 있을 보이지 않는 포막들에 대하여.


포막의 보호 아래 단단히 익어가다, 때가 되면 옆구리를 터뜨려 바람 속으로 날아가는 포자들처럼, 나의 재활 또한 이 시린 계절을 견뎌내고 무지갯빛 결실로 날아오르기를 소망해 본다. 고사리 포막에서 배운 생명의 소중함이 오늘 나의 차가운 뺨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양치식물 #좀진고사리 #배내옷 #해산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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