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환대(歡待)와 환대(環帶)
이중섭 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팝콘처럼 튀는 포자들의 보금자리 탈출
고사리 언덕의 벤허처럼 희망을 질주하는 생명들
제주를 떠나 통영에서 맞이하는 첫겨울. 긴긴 추위가 봄의 길목을 막아선 듯, 2월 말의 계곡엔 여전히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봄을 지극하게 환대(歡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무릎 끝으로 스며드는 서늘한 바람에 아쉬움만 깊어가는 시간이다.
꽃 없는 계절, 나는 책상에 앉아 고사리의 '환대(環帶)'를 공부하며 이 추위를 위로한다. 환대란 양치식물의 홀씨주머니를 고리 모양으로 에워싼 두꺼운 세포열이다. 물의 점착력과 증발력을 이용해 스프링처럼 뒤로 젖혀졌다가 순식간에 튕겨 오르며 포자를 방출하는, 자연이 설계한 정교한 투석기다.
어느 날, 층층지네고사리의 포자낭을 찍기 위해 접사 렌즈를 마운팅하고 숨을 죽였다. 뷰파인더를 확인하던 순간,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속에는 꼬불꼬불한 벌레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현미경으로나 볼 법한 그 생생한 환대(環帶)의 모습이 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고맙다, 벌레들아!" 숲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포자가 이미 떠나간 포자낭군을 역광으로 바라보니, 문득 이중섭의 '게' 그림이 떠올랐다. 서귀포에서 잠시 살았던 이중섭의 거주지, 그 초가집 마당에서 보았던 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고사리 잎 뒷면에서 바글바글 노래하고 있는 듯했다.
환대 세포들은 내벽은 어둡고, 외벽은 밝다. 어두운 색의 내벽에 의해 환대가 마디가 된 것처럼 보이고 그 모습이 벌레를 닮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 벌레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재빨리 앞으로 숙이는 동작을 상상하면 환대에서 포자가 방출하는 모습을 쉽게 그려볼 수 있다
양치식물의 자연사에서는 포자가 튀어 오르는 모습을 '팝콘이 튀는 것 같다'고 묘사한다. 0.25mm의 작은 주머니 속 64개의 포자가 허공으로 2.54cm 이상 솟구치는 장면. 그것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고사리의 치열한 의지이자, 난쟁이 나라의 투석기들이 일제히 포탄을 쏘아 올리는 장엄한 전투이기도 하다.
봄(Spring)은 튀어나오는(Spring) 것이라 했던가. 포자가 튀어 나가는 그 폭발적인 생명력을 떠올리며, 아직 오지 않은 통영의 봄을 기다린다. 고사리 잎 뒤에서 일어나는 이 신비로운 환대의 동작들이, 재활의 길 위에서 오늘도 꿋꿋이 버티는 나의 삶에도 뜨거운 희열로 튀어 오르길 소망해 본다.
딱딱한 용어, 말랑하게 이해하기!
(1) 포자낭(홀씨주머니) : 아기 포자들이 64명씩 모여 사는 '둥근 성채'예요.
ㅡ 포자낭군(홀씨주머니 묽음) : 포자낭들은 너무 작아 모여있답니다.
ㅡ 포막 : 포자낭들이 모여있는 천막인데, 아기들이 배내옷을 닮았어요.
(2) 환대(環帶) : 둥근 성채(포자낭)를 지키는 '등 굽은 64명 아기 포자들 투석기'예요. 물이 마르면 몸을 뒤로 홱 젖혔다가, 순식간에 앞으로 튕기며 포탄(포자)들을 쏘아 올려요!
(3) 포자(홀씨) : 투석기에서 날아가는 '팝콘 포탄'이에요.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까지 여행을 떠난답니다.
(4) 포자 방출 후 포자낭 : 임무를 마친 투석기의 모습이에요. 역광으로 보면 서귀포 바다를 기어가던 '이중섭의 게'처럼 보이기도 하죠.
환대(環帶)에 올라탄 벤허 / 고사리 언덕의 질주
통영의 시린 계곡, 얼어붙은 시간 위로
네 마리 백마가 끄는 전차의 환청이 들린다
2월의 찬바람을 가르며 채찍을 휘두르는
저 강인한 턱선의 영웅, 벤허의 질주가 시작된다
보아라, 층층지네고사리 뒷면의
환대(環帶)라는 이름의 거친 전차를
생의 마지막 물기까지 짜내버린 벤허의 자리
터질 듯한 근육의 함성으로 승리의 순간을 기다린다
찰나의 정적을 깨고 스프링처럼 전차가 튕겨 오를 때
전차 바퀴가 불꽃을 일으키며 결승선을 넘듯
예순네 개의 포자탄(胞子彈)은 허공으로 솟구쳐
겨울의 성벽을 허물고 봄의 영토를 탈환한다
환대는 고사리의 위대한 진화의 승리
삶이라는 거대한 경기장에서 낙상을 딛고 일어서
다시금 환대(環帶)라는 전차를 몰아 희망으로 질주하려는
어느 시니어 영웅의 위대한 '환대(歡待)'이다
#양치식물 #층층지네고사리 #환대 #이중섭 #게 #투석기 #질주 #벤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