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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03. 2024

챕터 16. 구면


    16. 구면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체크인 시점으로부터 한 달이 더 넘어간 11월 1일이 되었다. 그 사이 바깥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겨울이 바로 문 앞까지 온 것 같았다. 요양원 곳곳에서 보이는 풍경들, 특히 알프스의 설산들을 품은 자연경관을 보면 혹한의 계절은 언제라도 현관 초인종을 누를 것만 같았다.

    이곳의 연간 기후 변화를 모르는 나는 언제쯤 동절기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었다. 멈출 줄 모르는 호기심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현재 기온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가장 확실한 수단인 야외 수영장 벽에 달린 온도계를 참고하면 벌써 기온은 10도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온도계를 보며 혼자 놀라고 있는데 그 모습 하나로 내 심중을 간파한 건지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붙임성 좋은 그 직원에 따르면 잘하면 곧 눈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긴 한국도 빠르면 첫눈이 11월에 내리고는 했지. 그렇게 보면 알프스도 별거 없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눈의 촉감이 그리워졌다.


    수영이라는 새 목표를 세우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내 수영 실력은 안타깝게도 제자리였다. 처음 삼일은 공간 적응이라는 핑계로 선베드에서 시간을 보냈고(물에는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후 삼일은 그래도 물에 들어가 자유형 흉내를 내보았다.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살면서 어깨너머로 관찰해 온 자유형 동작은 굉장히 심플한 것이었다. 어푸어푸, 팔은 교차로 크게 상하 방향 회전을 시키고, 숨을 쉴 때는 오른팔을 돌릴 때 몸의 회전을 따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호흡한다. 간단하잖아? 물론 호흡과 팔동작의 미묘한 타이밍이라든지 물을 당길 때 손의 모양이라든지 디테일한 교정이 필요하겠지만, 큰 동작들을 흉내만 내어도 물을 밀고 앞으로 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우선 물에 떠서 나아가기만 한다면야 당장은 만족이었다. 내가 시간 기록 격파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타임 어택은 나중에 실력이 붙으면 저절로 욕심이 생기겠지.

    그렇게 대강의 자유형 동작은 숙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물에 들어가 처음 직면한 문제는 예상도 못한 물 위에 뜨는 것이었다. 어푸어푸 수영 동작을 시작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던지면 그대로 하체가 다시 가라앉아버리는 바람에 처음에는 수영 흉내도 낼 수가 없었다. 막상 시작하니 무력한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해서 처음에는 오기로 꽤나 열심히 물에 몸을 던져 대었다. 그래도 계속 시도하다 보니 조금은 깨달은 것이 있어 첫날이 마무리될 때쯤에는 한 번 정도는 좌우 스트로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에 뜨는 비결은 겁내지 않고 머리와 상체를 물아래로 박아 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신체 중에 가장 무거운 머리가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시소처럼 자연스레 하체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떠오르면서 가라앉지 않고 수평을 맞출 수 있었다.

    확실히 수영(아직은 물장구 단계였지만)을 하고 나오면 몸이 개운하고 활기찬 느낌이 들었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느낌이랄까. 막상 시작해 보니 수영을 배운다는 플랜은 안 그래도 요양원에 오자마자 크게 앓았던 적이 있는 내게 매우 적절한 처방이라고 생각되었다. 훌륭한 유산소 운동으로 알려져 있는 수영을 통해서라면 나의 심폐 지구력 향상은 물론이고 기강이 해이해진 면역력을 다시 단단히 다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제대로 된 헤엄을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한바탕 물장구를 치고 나오면 그날 밤에는 2km 랩 수영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노력은 그래도 배신하지 않았다. 사흘째가 됐을 때는 자유형 기본 동작(양쪽 팔을 한 번씩 휘젓는 것을 1회로 하여)을 연속해서 4~5번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휘적거려 이동하는 거리는 3미터가 넘을까 말까 한 제자리걸음 수준의 속도였지만 그래도 바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나의 주력기라고 할 수 있는 자유형.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법이지만 약간 불편한 부분이 계속해서 하나 있었다, 그 불만족스러운 점이라면 아직 숨을 쉴 때의 내 동작이 엉터리인지 아니면 원래 영법이 이 모양인 건지 호흡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자꾸 오른쪽 귀에 물이 들어가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잘 나가다가 귀에 물이 제대로 왈칵 들어간 경우에는 귀 안에 물이 고여 있는 감각이 수영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해서 나를 거슬리게 했다. 귓구멍을 아래로 하고 방방 뛰어도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에는 화장실의 어매니티로 제공되는 면봉을 하나 뜯어 귀에 쑤셔 박고 휘저어야만 해소가 되었다. 운이 나쁠 때에는 면봉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수분과 귀지를 머금어 축축하고 누레진 면봉을 손가락으로 꺾어 부러트리면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작별의 시간이었다.

    나는 자유형을 접고 평영으로 눈을 돌렸다.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평영과 접영은 자유형과 달리 숨을 쉬는 동작이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일 필요 없이 수평 상태로 수행되는 영법이었다. 그렇다면 귀에 물이 들어갈 일이 매우 적어지겠지? 여기서 왜 두 가지 옵션 중에서 접영을 배제하고 평영을 선택했는가 물어본다면 눈에 보이는 난이도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접영은 날치처럼 반쯤 비행하기에 더 복잡하다는 예측이었다.


    수영장 출석 도장을 찍기 시작하며 깨달은 것이 있는데, 바로 수영장이 이 요양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설이었다는 것이다. 야외 테라스를 최고로 알던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양원의 손님들 과반수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수영장에는 '나이가 들면 원래 물을 좋아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헤엄치는 것을 즐기는 노인들이 많았다.

    수영장에서 물개처럼 헤엄치고 다니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 다들 전생에 날치나 돌고래쯤은 되었는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페이스로 랩 수영을 하고 있었다. 수영장 옆면에서 노인들이 좌우로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래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80년대에 출시된 아주 오래된 컴퓨터 게임 '프로거'가 생각났다. 가로의 도로 위를 내달리는 차를 피해 개구리가 길을 건너는 게임이었는데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차에 치여 게임오버가 되었다. 개구리를 조작하지 않고 가만히 도로를 구경하면 차들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쉬지 않고 나타나 움직이는데 이 수영장의 노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밖에서는 골골대며 걸어 다니는 노친네들이 마치 물속이 원래 자신들의 세상인 것처럼 날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원래 그들이 인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몸동작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랩 수영을 하는 덕분에 나는 자유 수영 레인 구석에서 사람들을 피해서만 연습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도 늙어서 저들처럼 한 마리의 물개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수영 학습의 의지는 더욱 불태울 수 있었다. 바로 옆에 내 미래의 목표가 있다는 것은 동기부여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접영 얘기로 돌아와서, 수영장에 이토록 날아다니는 교보재들이 많았기에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의 차이를 세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선베드에서 나는 혼자 생각에 빠진 척 심각한 표정을 보이며 그들의 동작을 연구했다. 혹시나 그들이 그들을 관찰하는 나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낀다면 갈등을 겪을 수도 있으니까.

    결론은 접영은 너무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날개가 없는 사람이 날개를 편 날치처럼 어떻게 물 위를 날아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물속에서 보면 동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잠수 연습을 하는 척 물밑에서의 그 동작을 바라보았지만 더욱 미스터리에 빠지게 되었다. 몸이 물속을 미끄러지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힘 있게 휘저어지는 것처럼도 보였다.

    반면 평영은 우아하고 훨씬 직관적이었다. 단순한 동작에 굳이 물아래로 잠수해서 관찰할 필요도 없었다. 팔동작과 발동작이 따라 하기 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영이 어떤 영법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라면 '개구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떠올려보라고 할 것이다.

    그래도 강의 없이 흉내를 내어 그들을 따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유튜브에 검색 하나면 쏟아질 수영강의 영상을 보고 독학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직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 두려웠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내가 가족들과 차메로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있을까? 그것이 미지수였다.

    나는 6개월간 모르싸들이 어떤 족속들인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왔다. 이미 모르싸는 필요하다면 전 세계로 히트맨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임무를 주고 시간이 지나 결과 보고를 듣는다. 그들은 실패한 적이 없었고, 일 처리는 언제나 깔끔했다.



    마지막 수영은 오늘로 이틀 전인 토요일이었다. 자유형으로 몸을 풀고 평영 동작을 몇 번 흉내 내보는 것으로 그날의 수영을 마무리했었다. 평영은 약간의 내공이 쌓인 자유형과 달리 흉내를 내는 수준으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물에 뜨는 법을 이전의 자유형 시간에 숙지했으므로 동작을 따라 해 보는 것은 가능했다. 팔과 다리를 개구리처럼 휘젓고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에 머리를 다시 물에 넣는 과정에서 전신이 풍덩 하고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제는 쉬어 가는 날.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도 창세하실 때 6일은 일하고 7일째에는 쉬었다 하더라. 수영도 세상을 창조하는 것도 6일을 하면 7일째는 쉬어야 하는 법. 종교는 딱히 없었으나 창세 때부터 내려온 오래된 룰을 어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쉬고 돌아온 수영 주간의 첫날이 오늘인 것이다. 선진국들의 기업 문화가 주 5일제 출근이 자리 잡고 주 4일제 이야기도 나오는 마당에 주 6회 출석이면 굉장히 훌륭한 출석률이지 않나.

    11월과 함께 시작한 내 수영 2주 차. 시작은 물론 간단하게 스트레칭이었다. 지난번에 평영 킥 동작을 할 때 묘하게 무릎 연골이 아픈 느낌이었기에 오늘은 몸을 확실히 풀어주기로 했다. 한쪽 무릎을 옆으로 굽히고 다른 다리를 반대쪽으로 쭉 펴며 앉았다. 그렇게 양다리를 번갈아 가면서 다리 뒤쪽 근육들을 늘려주었다. 몸을 풀며 수영장을 둘러봤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노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사실 단체 손님이었던 어르신들이 손잡고 한꺼번에 퇴원을 하신 건가? 뭐가 되었든 사람이 적으면 마음 편하게 물장구를 칠 수 있어서 좋다.

    하체를 다 풀고 다음으로는 상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손깍지를 끼고 위로 들어 팔과 어깨의 관절을 풀었다.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다시 수영장을 살폈다. 오늘은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주로 자리를 지키던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라이프가드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늘 사다리 의자 위에서 빨간 티셔츠의 유니폼을 입고 세상 다 산 것처럼 심드렁하니 있었는데. 자신이 맡은 일을 빼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르긴 몰라도 여기 요양원에 일하는 스태프 중에 가장 열의가 없어 보이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도 일주일 내내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허전한 기분도 들었다.

    별 게 다 허전하네.

    몸을 다 풀고 이제 입수를 앞두고 있었다. 오늘 같이 사람 없는 날이 거의 없는데 뭔가 그냥 평범한 수영을 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눈치가 보이는 것을 해볼 좋을 기회였다.

    흠, 한번 조심스럽게 호기심을 풀어봐?

    야외 수영장은 수심이 1.4m로 일정했지만, 실내 수영장은 최고 수심이 2.5m로 수심이 1.2m에서 점점 깊어지는 초심자 접근 금지의 레인이 있었다. 물론 평소의 나는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지만 늘 궁금하기는 했다.

    깊이가 2.5m인 곳이면 물에 몸이 더 잘 뜨지 않을까?

    지금까지 혼자 익힌 물에 뜨는 감각을 한번 활용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2.5m인데?

    내 키보다 훨씬 깊은 수심에 조금 망설여졌지만 벽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사고가 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고개를 내밀고 2.5m 수심 위를 고고히 떠다니고 있었다.

    남자들의 유언 1순위가 ‘이 정도로 안 죽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고민을 하면서도 내 발걸음은 가장 깊은 코너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꿀꺽

    물 밖에서 바라만 보아도 확실히 깊은 것이 느껴졌다. 

    포기할까? 라이프 가드도 없는데.

    쪼그려 앉아서 저 2.5m 아래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수심이 얕은 곳보다 어두워 블랙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빨아들일 것 같은 수렁.

    아무래도 잠깐 자리를 비운 라이프 가드가 돌아오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바로 호루라기를 불어 제지할 것 같았기에 기회는 지금뿐이라 생각했다.

    그래, 도전해 보자!

    용기를 내어 벽을 잡고 매달려 물에 몸을 넣어 보았다. 그래도 큰일이 날 수 있으니까 몸을 유일하게 지탱해 주는 벽에서 떨어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리를 먼저 담그고 천천히 가슴께까지 입수했지만 역시나 발끝은 2.5미터 아래에 있는 바닥에 닿지 않았다. 두 다리를 열심히 교차로 휘저어보았지만 위로 떠오르는 부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깊은 물에서 둥둥 떠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떠있는 거야?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지만, 마침 생각이 수영장에 구비되어 있는 구명조끼나 킥 판 같은 수영 보조도구들에 닿았다. 안전장치가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 벽을 붙잡고 있거나 보조도구를 쓴다면 진정한 2.5미터 부력을 체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깊은 수심에 적응하는 의의로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튜브나 조끼가 없는 진정한 체험은 나중에 실력을 올리고, 직원의 감시 하에 하면 되니까. 구명조끼를 찾기 위해 벽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물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어디에 있었더라?

    벽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몸을 쑤욱 위로 올렸다. 물 밖으로 무리 없이 나온 나는 팔다리를 털어 물을 털어냈다. 허리를 폈다. 아까는 없던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공석이었던 라이프가드가 다시 돌아왔는지 빨간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반대편에 보였다. 그런데 늘 보던 심드렁한 청년이 아니라 금발을 길게 묶은 여자였다.

    어라, 담당이 바뀌었나? 잘됐다, 가서 인사도 하고 구명조끼 위치도 물어봐야겠다.

    나는 신나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얼마 만에 만나는 나이가 비슷한 이성인가. 젖은 바닥과 발바닥이 닿으며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그녀에게 향하는 흥겨운 발걸음에 찰박거리는 소리도 경쾌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안젤리카가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뭐, 인사는 할 수 있잖아? 그리고 그녀가 요양원에서의 내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알겠어? 정말 나 몰래 감시역이라도 배치해서 보고를 듣고 있다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그녀의 뒷모습에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었다. 내가 수영장 레인의 절반쯤 지났을 때 그녀가 하던 수건장 정리를 마치고 수영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내 몸이 얼어붙었다. 눈앞에는 카타리나가 빨간 라이프가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녀의 손에는 손님에게 나눠주는 새하얀 목욕 타월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네가 여기서 그건 왜 들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녀는 나를 바라봤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방금 물에 온몸을 담그고 나와 내 몸에 잔뜩 묻어 흐르는 물기에서 갑자기 피 냄새가 났다. 나는 재빨리 손을 급히 휘저어 몸의 피를 닦아 털어냈다. 손에 닦이는 물이 점점 끈적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날의 피처럼.

    손을 보았다. 피가 흥건했다.

    안 돼. 다시 보기 싫다고 했잖아.

    미친 사람처럼 양손으로 온몸의 물기를 닦아내려 했다. 그러다 그 자세로 멈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상행동을 하는 나를 그녀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우니?


    귀 바로 옆에서 카타리나가 다시 물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다. 넓은 수영장이 앞에 있었다. 청량한 푸른 타일의 수영장은 온통 검붉은 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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