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혼게이자이신문이 64년 동안 <나의 이력서> 시리즈를 연재하는 이유
일본 최대 경제신문사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일본경제신문)에는 1956년부터 지금까지 64년째 이어져 내려오는 연재 시리즈가 있습니다. <나의 이력서>라는 이름의 코너죠. 그 제목처럼 일본은 물론 국제 사회의 거물급 리더들이 자신이 살아온 일대기를 찬찬히 풀어내는 자서전 성격의 칼럼 시리즈인데요.
1956년이면 6·25 전쟁이 끝난 지 3년밖에 안 된 해이고 이승만 정부가 집권하던 시기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까마득히 먼 과거로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나의 이력서>는 한 편 글로 끝나는 일회성 칼럼이 아닙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한 인물이 일주일 동안 매일 자신의 인생을 담은 글을 기고했고, 1987년부터는 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기간이 한 달로 늘어났습니다. 한 달 동안 매일 약 30회에 걸쳐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독자들에게 풀어내야 합니다.
그동안 이곳 <나의 이력서>를 거쳐 간 인물들을 살펴보면 1950년대부터 2020년인 오늘날까지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일본을 이끌었던 리더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껏 900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필자로 글을 썼으니 일본 사회 최고의 리더들 중 상당수가 <나의 이력서>를 거쳐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깐 필자들을 살펴볼까요? 먼저 재계를 살펴보죠. 아무래도 경제신문이니까 필자들 중에서 기업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인데요. 일본 3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 혼다자동차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자가 모두 포함돼 있고요.
오가 노리오 소니 회장,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브랜드인 무인양품을 이끌고 있는 마쓰이 타다미쓰 회장도 역대 필진 명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틀만에 1500건이 공유된 <최고의 리더, 그들은 왜 글을 쓰는가> 시리즈 1회 글)
한국으로 치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급의 기업인들이 글을 기고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전문경영인 중에서는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같은 뛰어난 CEO들이 글을 쓴 셈이고요.
일본 총리를 지냈던 거물급 정치인들도 <나의 이력서>의 주요 필진이었습니다. 모두 여덟 명이 이곳에 글을 썼으니까요. 이중 한 명은 현직 총리일 때 신문에 글을 연재했죠.
경제와 정치 같은 딱딱한 분야에서만 필진을 모신 건 아니었습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배우, 작가, 가수, 화가, 음악가, 건축가, 스포츠 스타들도 필진 명단에 가득하니까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건축가 안도 다다오,
왕정치라는 한국식 한자 발음이 훨씬 더 익숙한 전설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도 <나의 이력서>를 연재했죠. ‘일본 추리 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는 <나의 이력서>의 초창기 필진 중 한 명이었고요.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6월엔 일본 최고 바둑대회인 기성전에서 8년 연속 우승하며 일본 바둑계의 전설로 불리는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 글을 쓰고 있고요. 한국으로 치면 조훈현 9단이나 이창호 9단과 같은 급의 기사죠.
외국인 필자들의 면면을 보면 더 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일본 신문에 일본어로 싣는 시리즈지만 다른 국가의 거물급 리더들도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면을 빌려 일본 독자들과 만났습니다. 물론 다른 언어로 쓴 글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실은 거죠.
대표적인 인물만 몇 명 살펴보면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 잭 웰치 GE 회장, 각각 미국 중앙은행(Fed) 총재를 지냈던 폴 볼커와 앨런 그린스펀을 들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를 이끌었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나의 이력서>에 연재된 내용들은 그저 신문 지면에 그치고 마는 게 아닙니다. 연재된 내용들을 묶어 책으로 출간하는 경우는 흔한 편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안도 다다오와 피터 드러커도 이런 방식으로 책을 한 권씩 냈죠.
신문에 연재했던 분량만으로는 책 한 권을 완성하기 힘드니까 연재 이후 작가가 직접 내용을 더하거나 니혼게이자이 기자가 필자를 인터뷰한 내용을 추가해 책을 완성했습니다.
여러 필자들의 연재를 한 권에 묶어서 출간한 책도 많았고요. 이런 식으로 <나의 이력서>를 거쳐서 출간된 책만 해도 200권이 넘습니다.
필자가 쓴 기고글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나 낭독 방송이 TV와 라디오 정규 방송으로 편성돼 방영되기도 했고요.
일본은 물론 전 세계의 리더들이 자신의 경험과 철학, 자신이 살아오면서 여러 위기와 좌절의 순간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에 대해 직접 설명한 글들이 책과 다큐멘터리, 낭독 방송으로 옷을 갈아입고 더 많은 수의 독자와 시청자, 청취자를 만나게 되는 거죠.
최고의 리더들이 갖고 있는 지식, 지혜, 경험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는 겁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나의 이력서> 시리즈를 영어로 번역해 자사의 온라인 영문 매체인 <닛케이 아시안 리뷰>(Nikkei Asian Review)에 <마이 퍼스널 히스토리>(My Personal History)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 독자들도 일본의 리더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일대기를 읽을 수 있는 거죠. 깊은 통찰을 담은 글인 만큼 이런 글을 읽은 외국인 독자라면 필자 개인은 물론 일본이란 나라 자체에도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겠죠.
<닛케이 아시안 리뷰>를 찾아 읽을 정도라면 각 나라에서 오피니언 리더라고 불릴만한 독자들일 텐데요. 전 세계 오피니언 리더들이 자연스레 일본, 일본 기업, 일본 문화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나의 이력서>를 통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경험과 그 과정 속에서 터득한 지혜를 매일 같이 대중들과 공유하고 있는데요.
최고의 리더들이 꾸준히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2016년 이세돌 9단을 꺾으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던 구글의 알파고를 기억하시나요?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수 있었던 건 그 이전 동안에 치러졌던 바둑 대국의 기보(바둑 경기가 진행된 과정을 기록한 문서) 16만 건을 바탕으로 바둑을 연습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프로 기사들끼리 맞붙었던 16만 건의 바둑 경기를 하나하나 분석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수를 둬야만 이길 수 있는지, 승리의 법칙을 학습해나갔죠.
아무리 탁월한 인재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일을 직접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그보다 더 짧으니까요. 세상 모든 일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서 배워갈 수는 없는데요.
이럴 때 앞서 걸었던 리더들이 남긴 글은 다른 이들에게 매우 소중한 안내서이자 알파고에게 주어졌던 바둑 기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직접 바둑을 두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남긴 기보를 보면서 공부하면 바둑 실력을 빠르게 늘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리더들이 남긴 글을 보면서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직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위해선 어떤 자세와 노력이 필요한지를 빠르게 배워나갈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지식을 간절하게 원하는 독자일수록 리더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바짝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흡수하죠.
지금껏 60년 넘게 이어져온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나의 이력서> 연재는 자신의 인생에서 한 판 승부를 준비하는 수많은 젊은 인재들에게 꼼꼼하게 작성된 훌륭한 기보와 삶의 지침을 제공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의 리더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봤는데요. 그 이유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머릿속에서만 담아두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꾸준히 글을 쓰는 일본의 리더들이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부러웠던 건 한국의 리더들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글 쓰는 리더들이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한국의 리더들이 글을 쓰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5가지 해악에 대해서 다뤄보려고 하는데요.
리더가 글을 쓰지 않으면 사회에 어떤 문제들이 생기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본 리더들의 글쓰기를 다룬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는데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오늘 글은 여기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최고의 리더에게 글쓰기는 취미가 아닌 사회적 책무다. 리더가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글을 통해 자신에게 통찰과 경험을 나눠준 앞서간 수많은 리더들의 헌신과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가볍게 여기는 행동이다.”
“최고의 리더에게 글을 써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건 사회적 의무다”
(지금 읽으신 이 글에 앞서 발행된 <최고의 리더, 그들은 왜 글을 쓰는가> 시리즈 1회 글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