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 쉬운 떡국을 끓이다
1.
19년 베이징의 여름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아침에 눈뜨면 34도인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고 그 여름에 엄마, 아빠는 한 달 살기 트렌드에 발맞춰 베이징으로 왔다. 걷기 중독인 아빠는 그 무더위를 뚫고 낯선 도시를 혼자 걷겠다고 했다. 아니, 핸드폰도 없고, 중국어도 모르시면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짜증이 솟구쳤지만 아빠의 고집은 원래 절대 꺾이지 않는 것. 아빠가 국제 미아가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함께 걸어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베이징에서 처음 제대로 된 산책을 시작했다.
이미지와는 달리(?) 베이징은 공원과 산책로가 많다. 걷기 마니아답게 아빠는 꽤 오래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조금씩 반경을 넓혀가며 자신만의 산책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입이 삐죽 나왔던 나도 함께 걸으며 감탄했다. 베이징이 이렇게 걷기 좋은 도시였다니.
사춘기 이후 처음으로 아빠와 가장 오래 걷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길은 늘 비슷비슷했고, 우리의 대화도 그랬다. 지긋지긋하고 즐거운 수다. 어제와 딱히 다르지 않게 서로의 건강과 끼니를 걱정하고 심이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다시 꺼내어 함께 웃었다. 물론 잔소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는 것이 옥에 티였지만 나의 마음이 중국의 땅덩어리처럼 넓어진 것인지, 걱정하기 대회 챔피언과도 쿵짝을 잘 맞췄다. 말없이 걷다가, 신나서 수다를 떨다가, 나란히 걷다가, 앞뒤로 걷다가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여름이 채워졌다.
걷다가 허기가 지면 쇼핑몰 푸드코트나 로컬 식당에서 맛있는 밥과 술을 찾았다. 공복으로 한참을 걷다 먹는 이국의 맛이 어찌나 꿀맛이었는지. 마트 푸드코트에서 기름범벅인 가지 무침을 먹고 너무 느끼해서 급하게 김치를 사서 뜯어야 했던 것도, 우연히 먹은 숙주 볶음에서 영혼을 위로하는 맛을 느꼈던 것도, 700원짜리 맥주 한 캔, 300원짜리 아이스크림에 끝내 주는 행복을 느꼈던 것도, 모두 오래 걸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 뜨거운 여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2.
오늘의 메뉴는 떡국이다. 육수와 떡, 계란만 있으면 한 그릇 뚝딱 만들 수 있다. 시중에 판매하는 비비땡 사골 육수로 만들어도 간편하고 멸치 육수로 내도 문제없다. 육수를 끓여서 물에 살짝 불린 떡을 넣는다. 지단을 만들면 깔끔하지만 우리는 그냥 계란을 후루룩 풀어버린다. 화룡점정은 역시 김이다. 김을 손으로 내 멋대로 짓이겨서 팍팍 뿌리고 고소한 참깨를 얹는다. 배가 자주 고픈 심이를 위해 우리 집 냉동실에는 떡국 떡이 늘 준비되어 있다.
떡국이라는 메뉴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해암쌤의 반응은 역시, "엄청 쉽네."
-맞아요, 아부지. 모든 게 쉽다고요, 마음만 먹는다면.
3.
아빠와 함께 걷던 그 여름까지 나는 한 번도 걷는 것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내게 그저 걷기란, 목적지로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여름 이후 나는 걷기 자체를 사랑하게 됐다. 아빠가 귀국한 후에도 매일 아침 편한 운동화를 신고 베이징이라는 낯선 도시를 혼자 걸었다. '혼자 걷는 기쁨을 내 다리와 오붓하게 나누면서'*. 걷는 동안 네 개의 계절을 가진 행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다 알게 됐다. 걷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온다는 것. 무기력이 덮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을 때도 나는 걸을 수 있다. 정말로,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걷다 보면 무거웠던 몸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4.
19년에서 4년이 흐른 23년, 서울에서도 우리는 걷는다. 걷기의 양상과 속도는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아빠는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걷지 못한다. 나이는 다리로 온다고 하던데 과연 그런 것일까. 한때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빠의 다리는 약해졌다. 기우뚱거리고, 지그재그로 걷고, 자주 넘어진다. 그 탓에 팔과 무릎,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났다. 노인이 되는 것은 다시 아이가 되는 것과 같다더니 아빠의 모습에서 처음 걸음을 배우던 꼬마 심이가 겹쳐졌다.
아빠의 변해버린 걷기 자세를 보는 것은 내게 고역이었다. 걷는 게 어색한 아빠,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아빠는 너무나 낯설었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빠 앞이 아닌 아빠 뒤를 따르며 걸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넘어진 아빠를 행여나 놓치지 않고 언제든 부축할 수 있도록 나란히 혹은 약간 뒤를 따르며 걷는다. 보호자의 위치가 바뀌는 순간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다.
5.
19년 여름 한 달간의 베이징 체류를 끝내고 돌아가며 아빠는 편지에 '지난 한 달이 할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라고 적으셨더랬다. 별거 아닌 일상이 뭐가 그리 행복하셨을까 싶다가도 아빠와 함께 걸었던 19년 베이징의 여름은 내 인생에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남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부터 걷기에 유난이던 그때의 아빠가 그리워 몸살을 앓는다.
그리움을 달래며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는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함께 길을 걷다 헤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나란히 길을 걷거나 한 사람이 앞서고 나머지가 뒤따르며 걷는다. 갈림길에 이르러서 우리는 한동안 서성거린다. 그러다 한 사람이 몸을 틀고 한쪽 길을 따라 걸어가면 남은 사람은 고개를 숙이며 배웅한다. 우리는 그 사람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함께 길을 걷다 헤어지는 것. 언젠가는 영영 갈라져 다시는 교차하지 못할 것이 우리가 걷는 길이다. 슬퍼할 필요는 없다. 누가 먼저 배웅을 하게 될지조차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까.
씩씩하게 함께 걷다 명랑하게 안녕하고 싶다.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인용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