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간의 종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Z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Z는 하계의 인간들보다 그 소식을 한참 늦게 들은 게 아쉬웠다. 공허에는 이승의 소식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Z를 제외한 다른 귀신들은 애초에 소식 자체를 몰랐다. 뭐, 이미 죽었으니 종말을 해도 딱히 상관없겠지만.
Z는 공허에 30년째 머물러있었다. 공허라는 곳은 하계와 천계를 잇는 곳- 그러니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공항 정도라고 볼 수 있는 곳이다. 대신 비행기를 타기 위한 게이트 대기 줄이 끔찍하게 길었다. 시간 개념이 흐릿해져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림하기에 족히 30년은 넘게 대기표를 쥐고 서있었다.
좀 더 착하게 살았더라면 벌써 천계에 닿았을 텐데, Z는 생각했다. Z는 불의의 사고로 죽었지만, 인간일 때 선량하게 살지 않아서 바로 천계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죽었거나, 타인에 의해 죽은 경우 바로 천계로 올라갈 수 있는데, Z처럼 하계에서 올바르지 못했던 사람은 제외되는 모양이었다.
Z는 30년 동안 가만히, 일주일에 한 발자국 정도씩 앞으로 나아가며 생각했다. 그날 놀이공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기구를 타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안전장치를 확인이라도 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죽은 몸 미련 갖지 않기로 했는데 자꾸만 후회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조금만 더 주의했다면 이곳에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처음 왔을 때보다 줄의 절반 정도 앞으로 왔을 때 즈음,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스러운 목소리인 걸 보니 또 어떤 귀신이 와서 새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년 한두 번씩 이런 일이 있었다. Z 역시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미 죽은 몸 뭐가 그리 바쁘다고.
다른 귀신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Z에게 가까워졌다. 가지런하던 줄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Z는 눈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보이는 흐릿한 모습에 Z는 눈을 찌푸렸다. 공허에 혼란을 준 귀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얼굴을 더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영미. 그녀는 20년 전 쯤 죽었지만 천계로 갈 생각 없이 하계의 어느집에 머물고 있었다. 무당의 집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Z의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친구였다. Z는 한 사람을 오래 만나는 것에 유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미처럼 5년 이상 오래 만난 경우는 드물었다.
Z는 영미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드디어 천계로 가기로 마음을 먹은건가? 그런데 왜 여기로 오고 있지? 같이 하계로 가자는 말을 하려는 걸까? 뭐, 아무렴 상관없었다. 30년만에 만난 유일한 친구인 건 변함없었으니까.
"정말 너야?"
Z는 다짜고짜 영미에게 물었다. 혼자만의 바보같은 착각이라면 딱 질색이니까. Z의 바보같은 질문에 영미는 얼굴을 찡그리듯 웃었다.
"나 아니면 널 만나러 올 사람도 없지 않아?"
영미의 말에 Z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 그것도 그렇지.
Z는 영미에게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시시한 장난을 쳤다. 영미가 무슨 일로 갑자기 여기까지 왔는지 물어보는 건 머리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한창 시시한 장난과 일상 얘기를 곁들여 하던 중, Z는 무언가 갑자기 떠올라 하던 말을 끊고 영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Z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미는 잠깐 무언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영미는 Z에게 가까이 귀를 대보라는 듯 손짓했다. Z는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며 영미에게 다가갔다.
"하계에 있는 인류가 종말 할 거야."
영미의 목소리는 다급해 보였다. 하지만 Z는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오늘이 며칠인지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거짓말 아냐. 진짜로."
영미의 목소리가 꽤나 진지해 보여 Z는 살짝 고민했다. 거짓말이 아닌가? 오늘이 4월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언제?"
"한 달 뒤. 아, 아니지. 이미 4일이 지났으니까 26일 뒤."
"..."
영미는 Z 가 답이 없자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봤어."
정확히 따지자면, 무당인 그 아이의 꿈을 같이 들여다본 거지만.
"어두운 바다가 보였어. 그러다가 한순간 암흑이 세상을 덮었어."
Z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믿을 수 없었지만 감성적으로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고 왠지 믿고 싶어지는 말이었다. 뭔가 두근거리는 일이니까.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있을까? 지금 당장 조선시대 황태자의 첩으로 빙의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드라마틱 하진 않을 것 같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 그래도 대충 믿어준다, 싶은 마음으로 오랜만에 하계나 내려갔다 오지 그래? 죽지 않은 모습의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
죽지 않은 모습의 사람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죽은 사람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의 생기가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아름다움도 없었고.
오랜만에 보고 싶기는 했다. 30년이 흐른 하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고, 종말을 알아차렸을 무당이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Z는 영미가 꿈에서 보았다고 했을 때부터 순수한 희생양 무당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30년 기다리는 거랑 300년 기다라는 건 비슷해."
영미가 Z를 설득하려는 듯 말했다. Z는 이미 마음속으로 하계에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뒤였지만.
"재미있겠네."
Z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누구나 넘어갈 만큼.
하계에 내려온 Z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30년 사이 이렇게나 많이 변하다니. 꼭대기를 보려면 목이 아플 정도로 높은 건물들과 수없이 많이 다니는 차들. 이런 곳은 30년 전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았다. 높은 건물에서 떨어진다거나, 건물이 무너진다거나, 차에 치인다거나...
Z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영미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곳이랑 전혀 다르네. 대충 구조만 비슷한데."
"확실히 그렇지?"
영미는 무심한 표정으로 익숙하게 길을 지났다. 아무렇지 않게 차를 통과하는 모습에 Z는 얼굴을 찌푸리며 최대한 차를 피해 영미를 쫓았다.
영미는 Z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30년 만에 만난 사이라기에는 다소 말이 없었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 어색해진 걸까? 30년간 모습은 변하지 않았지만 성격이나 가치관은 꽤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영미가 도착한 곳은 한 주택이었다. 무슨 무당이나 살 법한... Z는 주변을 둘러보며 영미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영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볼 사람이 있다며 넘겼다.
"널 보고 싶다고 했던 아이야."
"누구길래? 네가 나에 대해 말했나 보네?"
"걱정 마. 나쁜 얘기는 안 했으니까."
영미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향했고, Z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을 듣기 전에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어린 여자아이였다. 어리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너무 청소년인가? Z는 아무렴 어때,라는 마음으로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무당 아가씨."
무당 아가씨... 그러니까, 소녀는 Z를 보더니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소녀는 영미가 진짜로 Z를 데려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소녀는 영미와 함께 종말에 대해 알게 되고 영미가 질문 폭탄을 던지자 막기 위해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Z를 한번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 것 뿐이었다. 뭐, 영미의 말에 자주 등장하는 Z가 멋있어보여서 실제로 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Z는 살짝 어깨를 으쓱여 보이더니 자연스럽게 테이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앉았다기보다는 의자 위에 떠있는 쪽에 가까웠지만.
"신기가 아주 강해. 이 정도면 종말 해도 살아남을 판이야."
Z가 흥미롭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공허에 30년이나 있다가 온 귀신을 볼 수 있을 정도면 평범한 무당은 아닌 게 분명했다.
Z는 소녀가 아무런 말이 없자 고개를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인류의 종말이라면 공허와 천계는 어떻게 돼? 이미 죽었으니 안 사라지려나?"
Z의 말에 소녀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듯 답했다.
"아마 안 사라질걸요. 죽은 사람은 다시 죽지 않으니까."
"그럼 천계랑 공허는 정말 바쁘겠는걸.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온다니."
Z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소녀는 여전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 웃지 않았다.
"죽음이 허무하지 않아요?"
Z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참 미련한 질문이었다.
"... 죽음 중 제일 좋은 죽음은 불의의 사고야. 그 누구도 탓하지 못하되, 나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지. 절대 내 탓으로 돌리지 못하거든."
"...불의의 사고?"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운명적인 일들."
소녀는 입을 삐죽였다. 운명 따윈 믿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명 같은 게 어디있어요? 다 무슨 사고 때문이지."
Z는 가볍게 손 끝으로 소녀의 코 끝을 톡 치며 대꾸했다.
"놀이기구의 안전장치를 똑바로 매지 않은 내 잘못일까? 점검을 하지 않은 관리자 잘못? 이렇게 잘못을 따지다보면 마지막은 '놀이공원을 만든 사람 잘못'까지 가게 돼. 하지만 놀이기구의 안전장치가 빠진 게 놀이공원을 만든 사람 잘못일까? 그건 아냐. 확인을 했더라도 빠질 안전장치는 빠졌을 거야."
"..."
"그래, 불의의 사고니 운명이니 그런 건 핑계지. 그냥 아무도 탓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게 내 마음이 더 편하니까. 이기적이지?"
Z는 30분 뒤 그 집을 나섰다. 30분 정도 하계에 있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구경하러 갈 생각이어서, 최소 1시간은 하계에 있는 셈이었다. 영미 말처럼 더 오래 하계에 있다가 공허에서 300년 대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Z가 집을 나가기 전, 소녀가 물었다. 인간들 종말 하는 거, 통쾌해요?
Z는 의미 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혀. 오히려 아쉬운걸. 사람들이 고통스럽지 않은 마지막을 맞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