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은 Sep 21. 2024

새로 쓰는 버킷리스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창밖을 보니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마른땅을 적시고 있어. 비가 그치면 이제 청명한 하늘 밑에서 기분 좋게 살랑이는 바람이 불 테고, 그러다 보면 부쩍 서늘해진 기온에 가을 옷을 꺼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겠지. 눈을 감으면 포근하게 입고 선선한 날씨를 즐기며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네 모습이 떠올라. 너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코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렌다는 걸 너는 알고 있니?


잠에 들기 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날 본 영상에 달린 댓글 한 구절이 생각났어. 나이가 들수록 점점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지는데 인생은 날이 갈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 고민이라던 어떤 이의 인터뷰에 달린 댓글이었지.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


인생은 원래 시간이 갈수록 재미가 없어져요. 새로운 경험도 적어지고 성취감도 그렇죠. 어렸을 때 나열해 둔 버킷리스트도 이미 이것저것 다 이뤄봤고 이제 잔잔해질 일만 남은 거예요. 중년에 우울증이 많은 이유가 그 잔잔함에 적응하고 만족하지 못해서래요.


약간은 무심한 듯한 그 댓글을 읽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어. 아직 중년도 아니고 새파랗게 젊은 나는 왜 벌써부터 이 말에 공감이 가는 걸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니야, 아직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 재밌는 게 얼마나 넘치는데! 했을 나인데 말이야.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들이 많은 사람이 더 반짝이고 행복하게 달릴 수 있다는 말에는 동의해. 한창 작가가 되고 싶어 사방으로 방법을 찾고 끊임없이 글을 쓰던 시절 나는 가장 행복했으니까. 들뜨는 마음으로 책제작 모임을 만들고 책을 출판하는 모든 과정이 울컥하고 벅찼던 시절이 있었지. 그때의 나의 버킷리스트, 즉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들은 말이야. 광화문 교보문고에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이 있는 일, 나의 철학과 가치를 담은 글쓰기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 해외출장을 자주 다니는 멋진 직업을 가지는 일 같은 것이었지.


돌이켜보면 어쩌다 보니 그 모든 리스트를 다 이뤘네. <탐라지몽>으로 책을 내서 광화문 교보문고 한 매대를 다 차지했던 적도 있었고,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버키터스>라는 모임도 만들어 5년째 운영 중이니까.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고 있고 별 탈 없이 본업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그것들을 다 이뤘다고 해서 우리가 상상한 것만큼 곧바로 행복해지는 게 아니더라. 오히려 다음엔 더 큰 목표를 이뤄야만 행복할까 싶어 허탈해지더라고.


그렇게 난 깨달았지. 사람에겐 늘 새로운 꿈이 필요해. 그게 아주 시시하고 사소한 거라도 말이야. 다시 사는 게 재밌어지려면 내 버킷리스트를 다시 써야 한다고 느끼는 요즘이라 이 편지에 간단하게라도 담아보려고 해. 음, 먼저 나는 이제 다른 글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어. 시나리오라던지 작사라던지 하는 분야에 뛰어들어 볼래. 학원도 다니고 전문적으로 배워서 언젠간 내 이름으로 된 영화나 노래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그게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 살아가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과 가치들을 나눠보고 싶어. 작은 강연장에서라도 좋아.


본업에서도 행복하고 싶어. 힘들고 지치는 일 투성이겠지만 불평하기보단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일적으로도 부족함을 꾸준히 메워나가고 인간적으로도 좋은 동료가 되고 싶어. 또,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아. 나이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나는 나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지난 10년을 되돌아보고 싶어. 아, 그리고 언젠간 가지 않을 것 같은 나라를 여행해보고 싶어. 몽골이라던지 인도라던지 그런 나라를 가보고 싶어.


이제 건강에 특별히 신경 쓰고 싶어. 그게 마음이든 몸이든 간에 말이야. 마음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명상을 배울 생각이야. 언젠간 누군가를 대화로 치유할 수 있는 상담사가 되어보고 싶어. 그리고 무엇보단 가족에게 잘하고 싶어. 받은 것의 아주 일부도 돌려주지 못하겠지만, 같이 좋은 곳으로 여행도 가고 싶어. 이 모든 리스트를 이루는 시점이 가까운 미래가 아니어도 괜찮아. 넌 고직 인생의 절반의 지점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새로운 버킷리스트를 너와 공유하고 나니 다시 힘이 생긴다. 다시 힘 있게 웃고 반짝일 수 있을 것만 같아. 10년 뒤 네가 이 글을 보고 뭐야, 또 살다 보니 벌써 몇 개는 이뤘잖아? 하며 눈부시게 웃을 수 있기를. 그날을 위해서 또 힘내볼게. 우리 행복하자.


9월의 절반이 지난 어느 날,

새로운 마음으로

이전 22화 기대라는 무한한 파도 속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