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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Aug 05. 2021

심수봉 노래는 그리움이다

어느 날,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사건을 겪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시간을 되돌려도 결코 돌이킬 수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건, 기억 속에서 절대 지워낼 수 없는 사건. 그런 사건으로 인생이 갑자기 뿌리째 뽑혀 나갔다면...


  순간 혼몽하였다. 의식을 잃지 않았을 뿐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집으로 되짚어가는 길이 울렁거렸다. 차멀미를 하듯 속까지 미슥거렸고 눈앞이 흐릿했다. 멀쩡히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간다고 대문을 나갔던 내가 다시 현관문을 열고 헉헉거리며 들어오자, 엄마와 할머니는 순간 멈춤 상태였다.

 “엄마, 엄마,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대... 헉헉... 총에 맞았다는데...”

 “얘가, 얘가,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얘가 이래? 조용히 안 해! 누가 들을까 무섭다. 들어와, 빨리...”


  1979년 10월 27일 아침, 5학년이었던 나는 친구 집 라디오에서 뉴스를 듣자 곧바로 집으로 내달렸다. 이 사건을 보다 빨리 집에 있는 식구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집에도 분명 TV와 라디오가 있는데도 그랬다. 내가 왜 당시, 전투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달렸던 아테네 병사의 심정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라 잃은 백성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롤모델을 잃었다며 밤새 울었다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을 텐데 나의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왔던 어린아이는 국가 통치권자의 부재라는 사건에서 전쟁의 피 냄새를 감지했던 것일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는 어른들의 공포와 불안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날 이후, 사회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행동만큼이나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사그라들었다. 꿈틀거렸으나 이내 잦아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군사정권이 연장된 그 격변의 시기에도 이 땅의 중고등학생은 눈 닫고 귀 닫고 입 닫은 채 세월 아래 잠영하고 있어야만 했다.


10.26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심수봉(모자를 쓴 여자). 오른쪽은 함께 증인으로 출두한 신재순.




  대학생이 되면, 대학생만 되면 자유와 낭만은 감탄사에 따라붙는 느낌표와 같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1987년은 고약했고 힘들었다. 친구와 노래를 만들어 대학가요제에 나가자던 약속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상록수>에 묻혔고 향긋한 커피 내음은 찌든 담배연기와 매캐한 최루탄으로 대체되었다. 교내 확성기와 지하 술집에서는 막걸리에 출정가 소리만 드높았다.


  그날도 일찌감치 삼삼오오 술집에 앉아 거나하게 취해가고 있었다. 하나둘씩 학과 친구들이 모이더니 자리는 커져서 10명 남짓이나 되었다. 그때, 소란을 비집고 서부영화에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처럼 기타 하나 손에 든 차분한 얼굴의 한 사람이 등장했다. 우리 과 선배였나? 같은 1학년이라는 소개를 듣고도 어색할 만큼 나이 차가 느껴졌다. 이미 낯을 익힌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누나, <세월이 가면>인가? 박인희가 불렀다던 그 노래 한 번만 불러주면 안 돼요?"

남학생들이 애걸했다. 박인환의 시에 오누이, 박인희가 부른 그 노래 말인가?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면 창가에 앉아 청승맞게 한 번씩 불러보곤 했던 그 노래 아닌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 창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캬~ 노래는 그 언니의 음색과 찰떡궁합이었다. 애잔하고 쓸쓸하고 촉촉하고 고왔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에 대해 밤새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역시, 누나 목소리는 참 슬픈데... 그냥 좋아요!”

 "누나, 누나, 앙코르곡으로 이 분위기 이어서 <그때 그 사람>도 한번 불러주세요, 네?"

남학생들은 거의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목을 쭉 빼고 턱에 손을 괴었던가? 의자를 당겨 앉았던가?

 "에이, 술 맛있게 먹는데, 분위기가 그건 아니지. 좀 청승맞지 않니? 나는 그 노래를 부르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파란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야 했던 한 여자의 인생이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이 들어서 부르기가 힘들더라. 차라리 <세월이 가면>을 한 번 더 불러줄까?"


  그리움의 언어는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누구나의 가슴에 있는 그리움이 ‘그 눈동자와 입술’이므로 고통으로 퇴색되지 않고 순결해지는 것과 ‘외로운 병실과 철없는 사랑’이므로 회한(悔恨)이 되는 것은 차이가 큰 것이었다.

  




  그랬다. 우리는 심수봉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다. '심수봉'하면 하나둘씩 달려 올라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몸의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끌려가야 했고, 옆방에서 고문받는 남편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녀. 80년부터 그녀에게 내려진 방송금지 조치,  노래 가사가 국민을 선동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방송 하루 만에 금지 조치를 당한 <무궁화>, 79년 발표된 <순자의 겨울> OST는(1983년 가수 방미에 의해 <올 가을엔 사랑을 할 거야>로 변경해 불러 히트를 쳤다) 80년 전두환 정권의 출범으로 영부인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금지... 금지의 시대였다.


  노래 하나 제대로 부르지 못했던 시대를 심수봉과 우리는 건너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궁한 쥐가 고양이한테 대든다는 속담을 알고 있었음인지, 금지와 통제의 단두대 앞에 Sports, Screen, Sex(일각에서는 Sul 술과 Sorrow를 합쳐 5S라 하기도 했다)라는 소위 ‘3S’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유흥의 문화는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본거지는 부산이 적합했다. 부산은 그야말로 ‘핫’했다. 안테나 하나만 달면 일본 방송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바다 건너 유행하는 신문물은 하룻밤 사이에 부산에 도착해 퍼져나갔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어느 날부터 ‘긴기라긴니’ 노래를 따라 불렀고 보따리장수들이 들여온 코끼리 밥통을 들고 다녔다. 청소년들은 교복자유화 물결 속에서 일본 보이밴드, 걸그룹의 헤어와 패션을 따라 했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문물 중에 ‘가라오케’가 있었다. 일본말로 ‘공’(空)인 ‘가라’와 오케스트라의 준말인 ‘오케’의 합성어다. 가수의 노래를 빼고 합성된 기계음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시스템, 공간을 말했다.


  가라오케는 신과 흥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뿌리를 내리며 80년대를 휘어잡았다.

나는 이 유행의 소용돌이의 중간쯤인 91년도에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신입사원 환영 회식자리에서 처음 간 가라오케의 신문물에 홀라당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픔과 고통을 잊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슬픈 기억들의 유통기한은 우매한 나에게는 세 치 혀만큼이나 짧은 것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밴드의 황홀한 사운드는 무대체질인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고 처음 부른 노래가 왜 하필 그토록 입에 올리기도 꺼려했던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였을까?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아~~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 서면 잊어버리는/남자는 다 그래.

하고 노래가 끝나면

 “여자는 더 그래!” 추임새가 따라붙으며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뭐든 처음이 중요한 것인데... 첫인상을 결정짓는 ‘3초’의 시간을 바꾸는데 200배의 정보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심수봉의 노래를 부름으로 인해 나는 졸지에, 본의 아니게 ‘그때 그녀’가 되어 버렸다. 심수봉의 창법을 따라 하며 불렀던 콧소리, 비음이 곧 ‘생명’인 명가수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심수봉의 노래는 부를 때마다 커튼 없는 ‘커튼콜’을 받았고 그렇게나 청승맞다고 피하고 금지되었기에 금기시했던 그녀의 노래들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18번은 물론 16번, 17번도 심수봉의 노래로 채워졌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다정했던/그날의 우리 사랑 지울 수 없을 거예요/믿었었기에 사랑했었고/사랑했기에 슬퍼했었지/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마음 가져갔나요.

<당신은 누구시길래(1980년)>


그리운 바람처럼 사라질까 봐/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보고 싶고/당신이 너무 좋아.

<사랑밖엔 난 몰라(1987년)>


세월은 자꾸 변해만 가는데/잊으려고 애를 써도 못 잊고/술잔을 붙잡고/사랑의 노래를 붙잡고/남자 남자 남자의 눈물이 미워요.

<미워요(1989년)>


  1991년, 범죄를 줄이겠다는 정부 방침과 걸프전의 영향으로 유흥주점 영업시간을 자정까지로 제한하는 유흥의 통금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나의 무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1991년 와와 전자라는 곳에서 노래방 기계가 처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가라오케 아닌 보다 가벼운 노래주점에서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1993년 김영삼 정부는 노래방 청소년 출입금지 조처를 해제하면서 청소년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대거 노래방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더 이상 심수봉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지배 문화가 아닌 참여의 문화로의 이행이었다. 대중문화와 민중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안치환, 김광석 등의 뮤지션이 등장했고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아이돌 팝 세대의 댄스음악이 주류를 이루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비나리>의 노래 가사처럼,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은 덧없는 꿈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많은 것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 잊혔고 묻혔다.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도 내 운명은 항상 나빴다”라고 고백하던 심수봉의 눈물은 떨어진 지 오래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운명을 바꾸게 되었다는 <백만 송이 장미>의 신앙 고백도 희미해졌다. 무명용사의 무덤을 보며 조국을 위해 산화한 넋을 기린 <무궁화>는 다른 해석과 왜곡으로 애매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가끔 비가 오면 한 번씩 그녀와 그녀의 노래가 생각나는 것은 시대를 지나도 한결같은 사랑의 갈망에 대한 공감과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사랑밖에 난 몰라’ 라며 애절하고도 간곡히 노래하고 있을지, 못내 궁금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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