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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Oct 23. 2024

열여덟 번째 재주넘기

-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사랑하지 않는 것들의 차이점

<깊이에의 강요>



아무런 말도 남지 않았을 땐 글을 쓸 수 없다. 너무 많은 말들이 맺혀 있을 땐 쓰지 않는 게 좋다. 고여 있는 생각들 중에서도 반복하고 싶은 문장만 길어올린다. 고른다고 골라도 쓸데없는 말이 남지만. 말은 적을수록 선명해진다. 중요한 건 빈도가 아니라 농도니까.


서문을 다 읽기도 전에 반해 버린 책이 있다. 강렬하게 투명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글을 가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한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되뇌었다. 왜 글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던 차에 미처 원하는지도 몰랐던 답을 얻었다.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진실의 핵을 건드리'는 독서를 하라는 조언이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 그곳에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안 보뱅, p.91


깊이는 흔하지 않다. 아주 멀리까지 낮아져 본 사람만이 그 높이만큼의 깊이를 취득하게 된다. 아주아주 어려워 본 사람만이 또다른 어려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최소한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선택은 그의 몫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깊은 사람이 천진하기도 하다. 그건 삶에 대한 변함 없는 믿음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다시 한번 삶을 믿는 용기에서 오는 순수함을 사랑한다.


얼마 전부터 대표님이 기획하고 싶은 책을 묻는다. 들어오는 책만 처리하기도 바빴던 날들을 생각하며, 진짜로 내가 만든 책이 세상에 나온다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여전히 질문만 가득하고 답은 없다. 나도 내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 모른다. 서점 장바구니를 샅샅이 뒤져보자. 무려 100권의 책이 분야를 막론하고 뒤엉켜 있는 그곳에서 진실을 길어 올리는 것이다.


장바구니에 들어와있는 책을 크게 나눠 보면 이렇다.

1. 책에 관한 책 2. 쓰기에 관한 책 3. 여행 에세이 4.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책

그러니까 나는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여행을 하며 똑바로 살고 싶은가보다. 직접 쓰지 않고 만든다고 해도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잘 팔리는 책을 만든다고 무조건 사랑 받는 건 아니지만 어떤 책들은 사랑 받아 마땅하다. 반면 업계의 부작용 같은 책도 있다. 눈치 없이 올라온 뾰루지를 대하듯 흘겨 보게 되는 책도 많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지도 않으면서 책을 사랑한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최소한 좋은 책이 무언지는 바로 아는 거냐. 몇 달간 나 같은 타인에 의해 편집되고 가공되고 정제되는 글들, 그럼에도 감춰지지 않는 작가의 깊이. 섬광처럼 그런 것들을 마주하는 순간엔 이 엉터리 제조업계를 믿고 싶어진다. 다시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시간이 깊이를 담보할 거라고 대충 믿어버리고 싶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깊었으면 좋겠어. 나를 아주 조금씩만 확장시켜줄 글을 찾는다. 꿈틀대며 뻗어 나가는 책을 구한다. 결코 글이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무작정 반할 만한 책들도 분명 있으니까. 깊은 글, 깊은 사람, 깊은 기억을 뻔뻔하게 바라며 서 있을 테니까. 내 글에서 무의미한 문장을 모두 빼라고 한다면 백지만 남을 것이다. '나'를 거듭하는 나는 아직 그 정도 깊이뿐이다. 나를 멀리까지 사랑하는 일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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