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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Oct 20. 2020

밤 조림으로 가을을 기록하는 방법

#48. 영화『리틀 포레스트』속 밤 조림



가을이 되었구나. 바람의 촉감으로 계절이 변했음을 깨닫는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둔 노란 은행잎이 예쁜 계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지는 계절, 은은한 바람에 억새가 춤을 추는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금방 코 끝 찡해지는 겨울이 오겠지만, 지금 찾아온 보드라운 가을을 맘껏 느껴보고 싶다.     


아득한 외로움을 가지고 오지만, 모든 것이 맑고 빛나서 가을이 좋았다. 가을이 가진 빛깔 중에서도 특히 가을의 하늘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열다섯 소녀는 스스로에게 맑을 청淸과 가을 하늘 민旻을 써 청민이란 이름을 선물했다. 저렇게 높고 푸르고 아름답고 싶어서, 조금 쓸쓸해하고 많이 빛나고 싶어서.     


흘러가는 계절은 내년에 어김없이 돌아올 테지만, 언제나 떠나는 이보다 떠나보내는 이의 마음이 더 아쉽다. 왜 사람의 마음은 빈자리로 흐르는지 도통 알 수 없다. 허전함을 다 채우기도 전에, 발끝과 손끝이 벌써 시린 걸 보니 늦가을의 얼굴을 한 겨울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곧 금세 겨울이 오겠구나. 아쉬움을 담아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빛깔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좌) 홍차가 마치 사케같다. (우) 월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먹은 일요일 밤의 가을 야식.


밤 조림은 두해 전 가을부터 만들었다. 워낙 손으로 복작복작 만드는 걸 좋아하는 터라, (기숙사에서도 레몬 청등 뭔가를 복닥복닥 만들어 선물하기로 유명한 애였다) 밤 조림도 이리저리 만져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솔직히는 류준열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선 깜깜한 밤에 어울리는 밤 조림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첫 해에는 실패했다. 생각보다 밤 껍질을 까는 건 어려웠고, 한 번의 실수로 손끝이 베고서 두려움을 얻은 나는 밤 조림을 포기하고 냄비에 물을 넣은 채로 밤을 푹푹 삶아 먹었다. 뜨거운 밤 껍질을 손을 호호 불면서 까서, 꿀에 푹 찍어 먹어도 밤을 먹으면 되었지 하며 첫가을을 보냈다. 두 번째 해에는 깐 밤을 샀다. 깐 밤에 설탕과 물을 조금 넣고 알맹이가 뭉그러지지만 않도록 끓여 병에 넣었다. 설탕 조절에 실패하여 조금 단 조림이 되었지만, 늦가을부터 초겨울 사이 늦은 밤 입이 심심할 때마다 두 세알씩 꺼내 먹으며 밤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올해. 이번엔 용기 있게 그냥 밤을 샀다.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보니 뜨거운 물에 푹 담가 두었다가 껍질을 까면 조금 쉽다고 해서, 따라 해 보았더니 정말 껍질이 생각보다 잘 벗겨졌다. 누군가의 경험은 다른 누군가에게 이토록 쏠쏠하게 도움이 된다. 하나 둘 껍질을 까고, 몇 번의 세척과 정돈을 거친 뒤 설탕과 함께 조려 우리가 아는 밤 조림이 완성된다. 며칠 내내 퇴근 후 밤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 사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하늘이 조금 더 높아졌다. 품이 많이 들어 밤의 심지를 골라낼 때는,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지만 병 속에 퐁당 담긴 밤을 바라보니 뿌듯하다. 가을의 첫 열매가 여기에 툭 담겨있는 것 같았다.


3개월 정도 뒤에 꺼내 먹으라고 하지만, 성격이 급한 나는 일주일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가을밤을 몰래 한두 알씩 꺼내 먹었다. 달고 포근한 맛. 따끈하고 쌉쌀한 홍차 한 잔과 먹기에 딱 알맞은 맛. 전문가가 아니라 밤의 모양이 울퉁불퉁 예쁘진 않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가을을 닮은 밤 조림이 있으니, 이젠 겨울이 와도 괜찮겠다 싶은 마음도 슬쩍 들었다.


사람들은 가을을 어떻게 기록할까. 삶에서 어떤 모양으로 가을이란 계절을 간직할지 궁금해졌다. 내게 가을은 유난히 많은 감정들이 끼어드는 계절, 쓸쓸함과 불안이 일상을 자주 범람하는 계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계절, 외로운 마음 사이사이에 잘 익은 알맹이들이 있음을 발견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가을을 기록한다. 투박하게 끓이는 밤 조림으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충분히 외로워하는 시간으로, 엄마가 물려준 가을 재킷들을 꺼내 입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작지만 큰 나만의 알맹이들로 오늘 내게 주어진 계절을 채워 본다. 여전히 자주 쓸쓸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조각을 다시 발견해 내게 만들어 주는 계절. 게다가 내겐 가을을 닮은 밤 조림까지 있다. 가을을 그런 계절, 그래서 가을은 기록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어느 늦가을. 밤 조림을 꺼내 먹으며 오늘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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