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수업을 읽고서
뉴질랜드 이근택 목사가 내게 해준 이야기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프린트된 A4 용지 수백 장이 LA 공항에 주차된 수백 대의 차 앞유리에 붙어 있었다.
누군가 고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데 갈 수 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사연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짐작은 조금 할 수 있다.
고국에 있는 어머니가 아프든지 돌아가셨든지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먼 나라에 불법체류하면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했을 것이다.
매일같이 고국을 향해 떠오르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외치는 아픈 가슴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삶은 잔혹하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는 상실, 죽음, 고통, 질병들이 수시로 우리를 찾아온다.
그 모든 것을 어찌 다 막아낼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가슴에 큰 상처로 묻어둘 뿐이다.
그들과 함께했던 아름다웠던 기억만큼이나 가슴은 저릴 것이다.
그들을 사랑했던 그 따스함 만큼이나 가슴은 차갑게 시려 올 것이다.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의 몇백 배 몇천만 배 가슴 속에 큰 고통으로 남겨질 것이다.
내가 내렸던 결정들, 내가 했던 말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며 매일같이 아픔으로 남겨질 것이다.
마음 놓고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표현도 못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온 삶이 후회스러울 것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독방에서 살면서 외로움과 고독을 친구처럼 여겼다.
사람이 늘 그리웠고, 사람과의 만남이 늘 아쉬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뜻 먼저 나서서 다정하게 인간관계를 가지지도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늘 나보고 차갑다고 말하였다.
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그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그리고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자꾸만 다가오고 있다.
인생의 후반부를 살아가면서, 그동안 늘 친구처럼 생각해 왔던 죽음의 그림자가 내 곁에 바싹 다가선다.
뉴질랜드 여행 기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가 공동으로 집필한 “상실수업”을 읽고 묵상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다."
9년 동안 중풍을 앓아오면서 병실에 누워 마지막 유고작으로 남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녀는 상실과 아픔을 겪는 우리에게 이렇게 마지막으로 충고한다.
“슬픔의 힘은 희한하게도 슬픔을 치료하는 자체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슬픔의 은총이며, 슬픔의 기적이다.
그것이 곧 슬픔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