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식히기 위하여 읽는 책 한 권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상력 사전’이다.
629쪽에 해당하는 방대한 책이긴 하지만 읽기에 큰 부담이 없는 책이다.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짤막짤막한 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책에서 자신의 관심사가 얼마나 다양하고 폭이 넓은지를 보여 주고 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안에 백과사전파가 등장한다.
프랑스의 디도르(Diderot,1713-1784)와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백과사전을 편찬해 나갔다.
그들은 다양한 영역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이 결국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백과사전을 편찬한다.
다양한 지식의 축적과 발전이 보다 나은 행복한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청나라로부터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지식 속에서 그들은 그것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조선의 보다 나은 미래를 소망하였다.
다산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그는 비록 유학자이긴 하지만, 과학과 의학, 천문학과 지리학에 능통하였다.
그는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을 발명하였다.
시와 산문은 말할 것도 없고 서예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심지어 소현세자를 통하여 들어온 옵스큐라 카메라(obscura : 바늘구멍상자, 조선 시대에는 칠실파려안이라 불렀다.)를 사용하여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칠실(漆室)'은‘ 매우 캄캄한 방', ‘파려'는 '유리', '안(眼)'은 '보다'로 '캄캄한 방에서 유리렌즈를 통해서 본다'라는 뜻이다.
정약용은 복암 이기양(1744~1802)의 묘지명을 썼는데 거기 이런 내용이 나온다.
"복암은 예전에 나의 형님(정약전)의 집에서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을 설치하고 거기에 거꾸로 투영된 상을 취하여 화상의 초벌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공은 뜰에 설치된 의자에 해를 향해 앉았다. 털끝만큼이라도 움직이면 초상을 그릴 수 없는데, 공은 흙으로 빚은 니소인(泥塑人)처럼 단정하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또한 보통 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산은 그의 문집 '여유당전서'에서 칠실파려안의 원리를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이라 칭하면서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칠실파려안은 날씨가 맑아 광선조건이 좋은 날을 택했고, 시야에 장애물이 없는 풍경을 주로 촬영했다.
사실 촬영했다기보다는 그렸다.
아무튼, 이렇게 다방면의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다산은 넘쳐 흐르는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지식들을 가공하고 재생산하는데도 탁월하였다.
넘쳐 흐르는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그것은 다산이나 우리에게 주어진 똑같은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