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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11. 2016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어떤 분이 내게 말했다. “박근혜 씨도 대통령을 하는데 누군들 이보다 못할까요? 이젠 나도 대통령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대한민국은 ‘순실병’(집단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왜 허탈할까? 무엇을 기대했길래 이렇게 분노할까?

존 맥아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존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

“이 선거의 중요성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큰 그림으로 볼 때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국 대통령 선거는 별로 큰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흑암의 왕국은 흑암의 왕국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덕을 끼치지도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다가오는 일(대통령 선거)은 세상 나라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우리는 세상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백성을 잘 다스려 평안케 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게 해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가? 세상 나라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 인권을 생각하는 대통령,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통령. 모두 나쁘지는 않다. 가능하면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서 나라를 잘 다스려 주었으면 좋겠다. 세상 나라에 사는 자연인으로서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시민권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가지는 소망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초대교인들이 가졌던 소망은 세상 나라 백성으로서의 소망이었을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가지는 소망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초대교인이 살던 때는 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시대다. 로마의 앞잡이들이 이스라엘을 억누르고 강탈하고 폭정하던 시대다.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들어서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돌며 생활하거나 도둑이나 강도로 변하던 시대다. 정치, 경제, 문화, 윤리 어느 면을 보더라도 별로 소망이 없던 시대였다. 살아보니 헛되더라가 아니라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데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때 그리스도인이 가졌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행1:4) 그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조직도 없고, 전략도 없고, 자금도 없었다. 그들이라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달랐을까? 그들도 희망이 없었다.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이 임(臨)하였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시는 순간 그들은 새로운 소망으로 불타올랐다. 캄캄하고 답답한 세상에서 그들은 분명한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세상 나라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었다. 하나님의 말씀(통치)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 나라에서 추구하던 가치와 목표와 꿈을 다 버렸다.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헌신하였다. **


단지 전도해서 더 큰 교회, 더 부유한 교회를 만들 목표를 가졌다는 말이 아니다. 초대 교회는 오늘날 교회와 전혀 다른 목표를 가졌다. 그들은 성공주의, 기복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그들은 큰 건물도, 많은 수의 사람도, 부유함도, 명성도, 성공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 곧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그들의 목표와 가치를 재확인하고 서로 격려하였다.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소망 곧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소망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가치 기준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공화당이면 어떻게 민주당이면 어떤가? 보수적이면 어떻고 진보적이면 어떤가? 그런 세속적 가치 기준은 그리스도인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위치와 계급, 인종과 피부색, 지식과 재산,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모두가 하나라는 믿음이 있었다. 초대 교회 구성원을 살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종과 자유자(주인) - 당시 종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죽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 - 백 년 전 여성의 인권이 시작하였지만, 아직도 여성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2천 년 전 남녀 간의 차별은 상상초월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 수천 년 전통에 따라 유대인은 이방인을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헤롯당과 열심당 - 반민족주의자요 보수주의자인 헤롯당과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자객이 되기로 결심한 민족주의자는 원수임이 분명하다. 바리새인과 세리,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흑인과 백인, 지혜 있는 자와 무식한 자. 그들은 모든 세상적 장벽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다. 그들이 각자 처한 위치가 다르지만, 그걸로 누구를 차별하거나 조롱하는 일은 없었다. 비록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비난하고 저주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나라에 살고 있지만,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 성격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정치적 의견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한 나라의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어느 정당의 일방적 추종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기꺼이 품어 안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동안 한국 기독교는 반공이 곧 기독교 진리인 양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반공하면 무조건 추종하였다. 최태민이 구국선교단을 만들었을 때 수백 명의 목사와 교인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1975년 그가 반공 구국 기도회를 주도했을 때 마포구 동교동 중앙교회는 기꺼이 교회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최태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반공이란 말 앞에 총회장급 목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어쩌다 세상의 정치적 논리와 구호에 기독교인들이 정신줄 놓고 따라가 버렸을까? 너무나 가슴 아프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였다.(행20:17-32) 그의 고별 설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다.

 

1.

그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다고 자기 사역을 회고하였다. (21절)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의 가치와 구호를 따라갔다면, 이제는 돌이켜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물질주의, 성공제일주의, 기복주의뿐만 아니라 정치가들이 선동하는 구호와 정치 이념에 휘둘리며 살았던 삶을 돌이키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의 정치적 논리에 함몰되어서 좌우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아니다. 바울은 세속의 가치를 배설물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였다. 그 나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바울은 역사를 이끄시고 결론지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가지도록 가르쳤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에서 한 사역이다. (엡20:17-21)


2.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한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바울은 자신이 큰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하였다. (22-25절) 그런데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선포한다. 자신은 인간의 생명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조금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수 있기에 영광스럽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함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다. 바울은 바로 그 길로 힘있게 나아갔다.


3.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한 가지다. 에베소 교인들의 정신과 생각과 믿음을 세속의 가치관으로 훼손하려는 무리가 침범할 것을 염려하였다.(29-30절)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아닌 세상의 가치관에 미혹되어서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싸우는 일이 생겨날 것을 걱정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세상의 정치적 관점, 경제적 관점, 사회적 관점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분열하고 싸우는 것을 염려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목표와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밀려 다닐 것을 염려한다. 바울은 주와 은혜의 말씀에 에베소 교인을 부탁하였다. (32절)


비록 여러 가지 염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믿기에 주님께 부탁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잃지 않도록 주님께서 잘 이끌어 주실 것을 부탁한다. 비록 세상에서 온갖 추문과 오명을 뒤집어쓴다 할지라도, 비록 지하 땅굴 카타콤 속에 기어들어가 사는 날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목표와 사명을 잃지 않으면 소망이 있다. 주님은 이 미련하고 어리석고 죄 많고 약한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자 하였던 그 뜻을 반드시 이룰 줄 믿고 주님께 부탁하였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의 말씀을 부여잡기를 부탁하였다. 잠시 정신을 잃어버리고 세상일에 휘둘릴 수 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은혜의 말씀을 붙잡으라. 그리스도인은 맹목적 신앙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지혜와 지식으로 이 답답한 세상에서 길을 밝혀가는 사람이다.


주(註)

* 맥아더의 설교에 공감하는 바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면도 있다. 기독교는 정당의 정강 정책을 보고 뽑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당의 정강정책 중 오직 낙태와 동성애 문제만 보고 평가를 내린다는데 한계가 있어 보인다. 트럼프가 얼마나 소통이 가능한 인간인지,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가 전 세계에 어떤 아귀다툼을 만들어 낼지, 그리고 타민족과 타인종에 대한 어떤 차별을 하는지는 왜 살펴보지 않는지  맥아더 목사의 식견에 아쉬울 따름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내세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 숨어서 기도나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서 실현해 나가려고 힘쓰는 사람이다. 물론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실습을 할 장소는 바로 이 땅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면서 장차 임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이다.


사도행전

6. 기독교와 유대교

5. 어떤 공동체인가요?

4. 초대교회 회중은 가난한 민중이었을까?

3. 크레스챤인가? 크리스챤인가?

2.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일까?

1. 초기 기독교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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