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1년은 나의 집, 스윗 홈

Cat & Cozy Nest 프로젝트 | 집에 정들기

by 채루에 Ruhe

이 집을 계약하면서 마음에 걸린 유일한 사실은 집이 1년짜리 계약이라는 것. 독일의 큰 도시들, 그러니까 뮌헨, 쾰른,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들은 세 들어 살 집을 구하기가 힘들다.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인맥 없이는 그나마도 좋은 조건의 집을 구하기 힘든 경우가 태반인데, 지금 내가 사는 집은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인기가 꽤나 많은 동네에서 8년 동안 오르지 않은 집세를 보유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내놓자마자 나갈 매물 그 자체. 그래서 전 세입자가 베를린으로 떠나면서도 혹시나 베를린에 적응을 못하거나 정착하지 못하고 돌아올 상황을 대비해서 자기가 13개월짜리 세를 놓고 나간 쯔비쉔미터(1화에 설명했던 독일의 집계약의 종류로 주로 단기로 세를 놓을 때 쓰인다.)의 형태로 현재 입주한 상태다.


1년 뒤 다시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의 의미


이 집의 계약기간은 13개월, 그러니까 1년 하고 딱 한 달이다. 물론 그 사이에 연장이 될 수도 있고, 연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집주인(그러니까 전 세입자)은 입주 기준 내년 상반기(25년 상반기) 내로 알려준다고 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한참 뒤인 이제야 올리는 나는 사실 답을 알지만 그건 숨겨두고 일단 그 사이에 게으르지만 조금씩 적었던 일기들을 기반으로 적어보자. 알고 보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짐을 추린다고 추렸지만 또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들이 적지도 않은데, 그 와중에 이 집과 맞는 것, 맞지 않는 것, 바꿔버리고 싶은 것들이 잔뜩인 내게,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해 버린 내게, 1년은 참 애매모호한 시간이다.


맥시멀리스트의 짐 늘리지 않고 살기란

맥시멀리스트의 집은 눈으로도 소란스러운 느낌이다. 나의 “추구미”와는 거리가 멀어 매일 고민하고 스스로와 싸운다.

나는 그러니까 소문난 맥시멀리스트다. 얼마나 맥시멀리스트냐면, 친한 언니인 언니가 하루는 우리 집에 간단히 꿰맬 걸 가지고 왔다. 너네 집엔 뭐가 있겠지 하면서. 물론 내 반짇고리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 소문난 맥시멀리스트에게 이사란 사실 짐을 대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스스로가 얼마나 맥시멀리스트인지 알 수 있는 기회이다. 단순히 짐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화수분마냥 끊임없이 나오는 짐들을 하나씩 아무리 들여다봐도 버릴 게 생각보다 없다는 나의 마음가짐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마음먹고 조금이나마 줄여온 짐들을 늘리지 않고 1년을 버티기까지 얼마나 어려운지. 일단 고민 끝에 나는 냉장고만 사기로 했다. 지금 있는 싱크대 밑의 냉장고로는 도무지 외식만 하고 살 것 같기 때문이고, 미니멀리스트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엄마도 냉장고는 커야 한다고 말해준 덕분이 컸다. 1년 뒤, 처리하기 쉬운 짐들 외에는 늘리지 않기로 본성과 싸워보기로 한다.


정 주나요 정드나요


이사를 그렇게 다니면서도 나는 늘 사는 동안은 집을 꾸미는 걸 좋아한다. 특히 새로 들어간 집을 꾸미는 건 늘 새롭고 짜릿하달까. 이사가 스트레스라기보다는 기대되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것인 것 같다. 거한 쇼핑의 좋은 핑계와 영감이 되어주기 때문. 그러기 위해서인지, 혹은 그러다 보니인지, 솔직히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서 내가 꾸미고 사는 공간에 애정을 잔뜩 가지는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일 구석구석 닦고 돌보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청소를 할 때에도 애정을 가지고 하고, 무언가 자꾸만 사게 되는 것도 더 나은 집으로 나아갈 구석이 보여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 냉장고 말고도, 식기세척기도, 더 나은 소파도, 벽 페인트 칠도 사거나 하고 싶은데, 내 집에 되기까지 꾹 눌러 담고 있는 중이다. 마찬가지로 정도 너무 들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럼 헤어질 때 현실적인 아쉬움을 넘어선 무언가 조금 더 슬픈 마음이 들어버릴 테니까.


정과 함께 오는 동사에는 "정을 주다"도 있지만 "정이 든다"도 있다. 주는 건 주체적인 행위이지만 물이 든다 할 때 쓰는 이 든다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집에 정을 너무 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들어버리는 정은 어떻게 하나. 내 선택의 폭이 아닌 것을.

이런 추억들이 쌓이는데 어떻게 정이 안 들고 버틴단 말인가.

고양이 두 마리와 사는 E


나는 누가 뭐래도 확신의 E다. MBTI테스트를 하면 P냐 J냐는 거의 50 대 50으로 나오는 데에 반해, 절대 I일리 없다고 나온다. 내가 외향적이라는 건 타고난 거라는 에피소드도 다양한 데, 그중 우리 엄마의 단골 에피소드는, 내 또래 친구들은 알만한, 내가 어릴 적 자주 볼 수 있던 어린이 극장의 이야기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데다 한국을 대학생 때 떠난 나는 한국에서 아직도 인형탈을 쓰고 노래가 잔뜩 나오는 어린이 극장이 빈번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엔 꽤나 흔했다. 아직 둘째가 어릴 적인가, 혹은 어른들이 입장이 안되서였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한 번은 엄마가 나를 혼자 들여보내고선 밖에서 내심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연극이 끝나고 씩씩하게 걸어 나오는 내 양손에는 각각 새로 사귄 친구가 하나씩 있었고 엄마에게 신나서 새로운 친구들을 소개했다고 한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이 엄마의 '최애' 에피소드는 내가 얼마나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길 타고났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그렇듯 사람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타국, 독일에서도 금방 정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어나 한국어를 쓰는 친구들을 금방 사귀고, 그 친구들과 자주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독일에 온 지 2년이 접어들 즈음, 시루를 데려왔다. 생에 한 번도 동물친구들과 살아보지도 못했던 내가 어떤 용기가 불쑥 솟아났는지는 아직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강아지가 좋던 내가 고양이가 더 좋아졌고, 독일에서 깊게 정 붙일 곳이 필요하던 중에 주위에서 도와주겠다는 이들이 나타났고 운명처럼 시루를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왜 미디어에서 보이는 고양이와 사는 사람들은 주로 어르신이거나 홀로 집에 있는 싱글여성인지를.

연말마다 모이는 언니들과 이번엔 우리 집 집들이 겸 우리 집에 다 같이 모였다. 그러니까 2024년 연말에 말이다. 다시 한번 내 포스팅들이 얼마나 느린지 반성한다.

호스팅 라이프 시작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강아지들과 달리 고양이들은 산책을 할 수 없다. 물론 야외 외출을 할 수 있게 키울 수도 있지만 꽤나 시내에 사는 데에다, 시루 (그리고 지금은 보리도) 성격이 원체 낯을 가리지 않는 지라, 수의사들도 외출냥이로 키우기엔 위험하다고 말했다. 또 우리 고양이들이 워낙 미묘라 그런 것도 있다. (아 자식 자랑을 하는 마음이란 게 이런 거구나!) 그리고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양이들은 생각보다 독립적이지 않다. 집에 가둬두고 애정을 주지 않고 내가 밖으로 나돈다는 것 자체부터 너무 이기적이다. (쓰다 보니 또 미안한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그리하여, 시루와 보리와 집에 자주 있을 필요가 생겼다. 홀로 고양이 둘과 살기 전에도 애기들이 혼자가 아니더라도 일정 시간은 애기들과 보내고 싶었지만, 이제 나만 바라보고 살 우리 냥이들을 두고 나가긴 더욱 어려워졌다. 더군다나 여행을 좋아하는 나라서,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날들은 더더욱 아기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밖에 나갈 수 없다면 선택지는 자연스레 좁혀졌다. 우리 집에 초대하자. 그렇게 나의 독일 호스팅 라이프는 시작되었다.


여기서 내 자아의 충돌이 생긴다. 고양이가 있는 집은 자고 일어나면 모래와 털과의 싸움이다. 늘 깨끗한 집을 유지하는 데에도 손님이 온다고 하면 특별히 더 청소하는 엄마 손에 자란 나는 집에선 게으르기만 하고 싶은 직장인의 자아와 손님이 오면 집을 치워야 하는 자아를 두고 그 충돌에서 고통받는다. 요즘은 자주 오는 친구들에겐 조금 (많이) 느슨해졌지만, 그래도 누가 온다고 하면 이틀 전부터 계획적으로 슬슬 치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페인트칠은 어떡하지


이 집의 전 세입자가 8년 전에 어떤 모습의 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급하게 이사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 운 좋게 맞아 좋은 매물을 일시적이나마 넘겨받은 조건 중 하나는, 보통 독일에서는 하고 나가는 페인트칠을 하지 않고 나가는 거였다. 그래서 이 집의 구석구석엔 8년의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특히 전에 살던 집은 깨끗하게 페인트칠하고 나온 마음에서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 동네에 이 가격의 집은 요즘 찾기 정말 어렵다는 점을 다시 세뇌였다. 전 세입자도 싱글 여성인데, 그녀 역시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었고, 그중 한 마리는 스핑크스였다. 스핑크스가 털이 없어 키우기 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만큼 몸에서 나오는 기름이 털로 가지 않고 가구나 벽에 시간이 지나며 묻는다. 그래서 우리 집 역시 어디가 고양이들의 애정 어린 장소였는지 볼 수 있다.


독일에서만 이사를 벌써 4번째 하고 있는 내게 페인트칠은 사실 오히려 재밌기도 한 부분이지만, 그건 짐을 넣기 전이나 빼고 나서 텅 빈 집에 페인트칠을 할 때 이야기이다. 이미 짐이 다 들어와 있고, 심지어 고양이도 들어와 있는 이 집은 페인트 칠을 하기 벌써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골 아프게 페인트칠을 했다가 막상 13개월 뒤 재계약이 되지 않으면 무슨 헛고생이란 말인가. 그래서 전 세입자가 칠해둔 마음에 안 드는 침실의 민트색 벽도, 거실의 얼룩진 천장도, 생활의 때가 보이는 코너 벽도 흐린 눈을 하기로 했다. 이 건, 13개월 뒤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내 머릿속에서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딱 필요한 자리에 못이 박혀있어 제일 좋아하는 액자 두 개를 걸고 사진을 찍으니, 눈으로 볼 때 보다 얼룩덜룩한 벽에 놀랐다.

고작 30 몇 년 산 주제에 인생 어쩌고 하는 게 어줍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누구보다 어리고 누구보다 나이가 많으니 굳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하고 사는 게 내 신조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뭐. 누가 나로 살아봤담. 인생엔 흑백으로 맞고 틀리고인 일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흑과 백 사이 회색 그 어딘가가 답인데, 참 회색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가. 그래서 정확히 어느 지점이라고 말하기 뭐 하고, 사실 나도 모르지만, 그 지점을 찾아가는 선택의 기로가 많다. 지금의 내 상황 역시, 이 잠정적 장기적 주거지이지만 단기로 끝날 가능성이 강한 이 집을 두고, 얼마나 갖추고 살 것인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1년의 시간 동안 잘 맞는 회색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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