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퇴사를 하고 나서 카페에 갈 일이 부쩍 늘었다. 어렵게 끊었던 커피에 다시 손을 대니 조금 억울함이 솟구치지만 적절한 집중력을 올리는 데에는 카페만 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차를 마시자고 다짐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든 채 가장 편한 좌석을 찾아 이동한다. 자리에 앉으면 적당한 소음이 선명해지는데, 그것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 의해 형성된다. 반 정도는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고 반 정도는 누군가와 같이 온 사람들이다. 그들에 의해 집중하기 좋은 배경음이 형성되니 어쩐지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은 누군가가 그립다가도 금세 그 외로움은 사그라든다. 지금 이렇게 혼자 앉아있는 시간이 꽤나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던 것 같다. 지금이야 혼자 무엇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혼밥을 하는 것도, 혼영을 하는 것도 어떠한 도전의 범주에 속했다. 그 도전에 실패한 이들은 나에게 늘 우려 섞인 질문들을 던졌다.
혼자 학식을 먹을 때면 "왜 혼자 먹어?"(친구 없니)
혼자 노래방에 가면 "심심하지 않아?"(친구 없니 22)
혼자 영화를 보면 "팝콘은 혼자 다 먹어?"(친구 없니 33)
중앙경찰학교 생활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단 2번의 외박 후 전면 외박이 금지됐었다.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은 없었고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온 신경이 복작복작했다.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에 목이 말랐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건, 일찍 일어나는 것이었다. 새벽 4시가 채 되기 전에 일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아무리 중경의 빡빡한 스케줄이라도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왜 피곤함을 무릅쓰고 이토록 혼자만의 시간을 찾았을까, 혼자 있는 시간을 어려워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혼자 있는 시간에서 더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수영을 시작했다. 오전 6시, 월수금반, 화목반 모두 등록해서 주 5일 강습을 받았는데, 남들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운동신경 때문이지 어쩐지 진도가 훅훅 나가지 않았다. 같은 선생님, 같은 시간, 같은 에너지로 수업을 받는데도 남들보다 뒤처졌다. 월수금반만 혹은 화목반만 하는 수강생들보다도 더. 나는 아직 1 레인인데, 같이 수업을 받았던 수강생들은 어느새 2 레인에 가있었다. 선생님이 아무리 자세를 잡아줘도 그때일 뿐 내 자세는 늘 어딘가 이상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개헤엄이 나을 수도 있었다.
"어떤 동작이든지 딱 한번 스스로 느끼는 게 중요해요. 그걸 몸이 기억하면 절대 안 잊어버려요."
수업시간은 늘 바쁘게 흘러갔다. 선생님이 지도를 해주면 그걸 재빠르게 익혀서 되든 안되든 레인을 몇 바퀴 돌아야 했다. 계속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온다는 느낌 때문에 자세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싶으면 멈춰 서서 레인에 바짝 붙은 채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동해야 했다. 내게는 천천히 동작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단 몇 분이라도. 때문에 6시 50분에 수업이 끝나면 10분 더 연습했다. 한 바퀴를 채 돌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된 자세로 헤엄쳤다. 물을 많이 먹어댈수록 물속에서의 팔다리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10분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른 채, 2 레인에 있던 수강생들을 제치고 3 레인으로 갈 수 있었다. 내 동작을 잡아주느라 애썼던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맨날 남아서 연습한 효과가 있네요. 내가 완전히 체화하는 순간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뭐든지 간에."
새로운 것들을 배울 때는 내가 아닌 것들로부터 배우지만, 배운 것들을 몸에 완전히 익힐 때는 꼭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끝을 맺어야 한다. 이것이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다. 무엇이든지 간에 내 머리에 넣는 시간, 내 몸에 익숙해지는 시간, 내 마음에 스며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오로지 내 감각으로 익혀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진짜 실력이 성장하는 시간.
30대가 넘어가니 대분의 인연들이 10년 전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인연들과 1년에 몇 번씩은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서로 놓쳤던 근황에 대해 주고받는다. 어느 정도 서로의 근황이 파악됐다 싶으면 자연스레 함께했던 순간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맞아. 우리 고등학교 때 너가 준 편지 별 내용도 없는데 눈물 났잖아."
"우리 그때 취준생이었는데도 뭐가 좋은지 별거 아닌 거로 엄청 웃었잖아."
그리곤 오늘도 너무 반갑고 즐거웠다며, 다음번에 또 만나자며 서로에게 만남의 의무를 부여하고 헤어진다. 이상하게 자주 만나지 못하는데도 그들과의 관계는 오랫동안 유지된다. 그 이유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함께 보냈던 시간으로 형성된다. 그 시간이 늘어날수록 관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건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와의 관계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면 나만 아는 비밀을 만들어야 했다. 혼자서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든, 끌리는 책을 읽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든, 가고 싶었던 장소에 가든. 오로지 내 취향에 의해 구성되는 시간들. 날 것의 나를 볼 수 있는 시간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총집합시켜 일기의 형태로 기록해 놓는 거다. 그 과정에서 나와 대화의 대화가 늘어난다.
"오늘 먹었던 순댓국은 어땠어?"
"비도 오고 쌀쌀한 날 먹으니까 피로도 풀리는 것 같고 좋더라. 조금 힘든 날에는 다시 먹으러 와야겠어."
"너 오늘 약간 번아웃 온 것 같은데..."
"응. 그래서 좀 쉬면서 나는솔로 봤는데 아무 생각 안 하고 집중하다 보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어. 난 재충전할 때 이걸 봐야 하나 봐."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가고,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겨둘 때면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조금 쉬워진다. 내가 힘들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궁극적으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그리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나를 잘 아는 선택들이 늘어가면 오히려 무너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어떤 식물은 일주일에 한 번, 어떤 식물은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줘도 충분하다. 좋은 건 무조건 많이 줘야 한다며 물을 계속 퍼부으면 그걸 감당하지 못한 채 죽는다. 물을 흡수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광합성을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튼튼한 뿌리를 내린 채 자라날 수 있다. 식물도 이럴진대 사람의 성장이라고 다를까. 성장하고 싶다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퇴사를 하고 나서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의 실력을 키우는 시간이 필요했고, 내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 오랫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종 어떤 일을 하고 나면 내가 좀 더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특히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