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는 등산할 때나 쓰는 말(응?)
남들이 부와 명예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때 나는 백패킹 몇 회와 등산 다회로 종아리에만 힘을 잔뜩 넣고 있어 다소 조바심을 느끼는 40대이지만 즐거운 걸 참을 도리가 없어 타고난 주둥아리와 후천적으로 얻은 종아리로 영남알프스 환종주를 기획하고 주변인들을 모았다. 나를 중심으로 모인 6명(그중에는 산보다는 백패킹을, 백패킹보다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섞여있다. 아마도 등산과 캠핑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인 거 같다.) 이서 영남알프스를 가기 위해 단톡방을 만들고 구글스프레드시트로 정보를 모으면서 영남알프스의 9봉 중 5봉을 넘을 수 있는 영남알프스 환종주를 준비했다. 5개의 산봉우리 중 100대 명산도 두 개나 있어 명산 인증에 대한 광기를 조금이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영남알프스 환종주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1일 차
수서역-울산역
이틀 연차와 주말을 이어 목금토 동안 영알 환종주를 시작하는 이른 아침 남편과 나는 수서역에서 기차를 탈 예정이다. 일반택시를 타면 우리의 집채만 한 가방이 거부당할까 싶어 수서역까지 IM 택시(카니발 택시)를 불러서 이동했다. 매일 나서는 집인데도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으니 나는 현관문에서부터 의식적으로 여행자의 목소리와 몸짓을 하기 시작했고 출근시간에 배낭 메고 수서역 가니까 자꾸 입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여행 시작 행복 거품이 가득한 아침의 기분을 글을 쓰는 지금에도 아직 잊지 않아 다행이다. 사실 여행의 시작에는 별게 다 설레어서 srt 맨 뒷좌석 자리와 벽 사이에 가방이 쏙 들어가는 것에도 설레어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맨 뒷좌석을 예약한 남편은 천재라고 몇 번을 말했다.
최종적으로 영남알프스를 함께 하기로 한 5명 중 울산역에 4명이 모였다. 나머지 한 명은 회사 업무를 다 못 마쳐 다음날 종주의 중간 코스인 죽전마을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할 일은 울산역에서 1킬로 정도 거리의 24시 언양 돼지국밥까지 걸어가는 일이었다. 그날 먹은 돼지국밥의 맛에 대해 논하고 싶지만 사실 무슨 맛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마도 욕심이 과해져 국물에 다진 양념을 너무 많이 풀어 순정의 맛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등산 전후에 국밥이 왜 이렇게 당기는지 분명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 거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택시를 나눠 타고 배내고개 휴게소로 이동했다.
배내고개~쇄점골약수터~샘물산장
오후 두 시 정도에 산을 오르기 시작해서 한 시간 반 정도 걸으니 쇄점골 약수터가 나왔다. 약수터는 물을 보충하는 역할도 하지만 길게 이어지는 중간에 어떤 명칭이 붙어있는 기점을 확인하며 단기 목표를 달성하며 걸음을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약수터에서 물을 보충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길을 나선 뒤부터 경사는 완만하고 덥지도 춥지도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으며 몸의 컨디션까지 좋은 개기일식과 같은 모든 요소가 받쳐주는 트래킹을 했다. 이미 배내고개에서 출발할 때 700 고지였기 때문에 완만한 길을 걷는데도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은 덤이었다. 만족스러운 걸음을 걷다가 막걸리나 두부로 요기할 수 있는 샘물 산장이 네시 반에 닫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일행들은 그냥 다음에 가…라고 말은 하면서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점 경보 시합처럼 걷다가 산장에 거의 다다라서는 다 같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행복의 개기일식 선상에서 샘물 산장이 혼자 이탈하여 문이 닫혀있었다.
천황산
문 닫은 샘물상회를 뒤로하고 천황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은 억새와 가을 하늘에 걸려있는 조각구름이 ‘나정말 절경이지, 신이 주신 선물이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며 연속적으로 등장해서 우리를 감탄 과부하 상태로 만들었다. 걷고 또 걷고 오르고 올라 5봉 인증의 첫 번째 천황산을 인증하고 첫째 날에 일정을 잘 마친 안도감과 뿌듯함으로 천황산 아래 마련된 천황재 데크에 텐트를 쳤다. 해가 지니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져서 오들오들 떨면서 말이다. 비화식 용기에 햇반컵밥을 데워먹고 잠들기 전 친구가 건네준 위스키 한잔이 너무 맛있어서 몸서리를 치면서 좋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수많은 인스타와 블로그에서 천황재 데크에서 야영하는 사진을 보고 걱정 없이 야영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뜨고 나니 야영금지라는 팻말을 보게 되었다. 왜 금지일까 생각해보니 주변에 은근히 쓰레기가 있었다. 그래서 바뀐 것이다. 심장이 따꼼거린다. 그냥 나 혼자 흔적 남기지 않고 자연을 즐기는 것만으로는 이 즐거움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쓰레기 버리는 행동을 노려보고 있는 것으로 행동을 해보려 한다.
2일 차
천황산-재약산(포기)-죽전마을
아침에 일어나니 일행 중 한 명(어제 나에게 위스키를 건넸던 친구)이 허리의 고통을 호소했다. 배낭을 메는 첫걸음부터 허리를 삐끗해서 억지로 참고 올라왔다고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등산은 안될 거 같은 몸이 되었다(다행히도 나중에 크게 다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우리는 지도 앱을 다 같이 켜고 차량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았고, 재약산 일출을 보기로 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주암 삼거리 매점 위치로 친구를 내려보내기 위해 친구의 짐을 나눠 들고 이동했다. 죽전마을에서 만나기로 한 또 한 명의 멤버는 서울에서 이미 출발해서 오고 있고, 몸이 아픈 한 명은 새로운 루트로 하산해야 하고, 이 멤버들은 나를 중심으로 모였으니 책임감이 느껴져서 뒤에 짊어진 백팩만큼이나 심리적으로도 압박이 왔다. 다행히 날씨가 좋고 언덕을 오르지 않고도 탈출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서 다 같이 그쪽으로 이동해 친구를 하산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은 사자평 억새길을 지서 질리도록 억새를 보고 그리고 억새에 수많은 따귀와 회초리를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억새는 볼 때만 좋은 것이었다. 삶의 대부분이 멀리서 봐야 희극이듯이.) 유일한 등산로 구간을 뒤덮은 억새와 내 키만한 풀들을 헤치면서 걸어야 하는 코스를 지나니 끝이 없는 하강길이 있었다. 죽전마을로 하산하는 길은 경사가 계속 급하고 발이 앞으로 계속 쏠려 엄지발톱이 나의 체중 + 백팩의 무게를 감당하는 기분이었다. 걸으면서 아마.. 엄지발톱이 빠졌겠지… 빠졌을 거야 하고 양말을 벗어보면 엄지발가락이 태연하게 살아 있었다. 쉴 때마다 엄지발톱의 안부를 확인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조심조심 하산했다. 죽전마을 하산길은 내가 겪은 모든 하산길중에 가장 나에게 무지막지한 하산길이었는데 만약에 내가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런 경험을 했으면 나는 영영 등산과 손절했을 것이다.
죽전마을 - 오토캠핑(갑자기)
죽전마을을 내려오니 말도 안 되게 큰 규모의 카페에 합류하기로 한 또 한 명의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반가움과 각자의 여정의 에피소드를 나누고 아이스라테를 들이켜고 카페 화장실에서 폼클렌징으로 세수를 하고 잠시 심신을 달랬다. 그리고 밥, 너무도 소중하고 아프면 안 되는 등산 후 산채비빔밥을 먹으러 수명이 다한 줄 알았던 엄지발톱이 달린 두발을 움직여 식당까지 1킬로를 더 걸어갔고 결국엔 극락을 경험하였다. 걷는 길 내내 여기가 배내골이라서 식당 이름들이 배내치아… 이렇게 지은 건가 이태리 베네치아랑 무슨 상관이지… 혼자 헛웃음을 웃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의 치밀하게 계산된 일정으로는 밥을 먹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영축산을 다시 넘는 것이었는데 시간도 지체되었고 무리한 등산계획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내골에 있는 오토캠핑장을 하나 급하게 예약해서 신나게 먹고 놀게 된다. 포기하는 것은 잠깐 스스로를 실망시키지만 얼마나 큰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지. 삼겹살을 굽고 맥주를 마시고 케이크를 사서 생일파티를 하고 이렇게 등산 안 하는 게 즐거울 일이면 종주를 왜 하자고 했었는지 서로 물어가면서 말이다.
3일 차
간월재 - 간월산
오토캠핑장에 예약 막차를 타서 샤워실 앞자리에 텐트를 쳤기에 시끄러워서 잠 못 자겠군… 하고 누운 이후로 기억이 없다. 거의 기절컨셉으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우리는 아직도 영남알프스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어 또 설레버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차도 옆을 3킬로 정도 걸어 간월재 입구에 가서 신선한 사과와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와 커피를 한잔씩 먹고 백팩은 캠핑장 사장님께 맡겨두고 간월재 트래킹 코스를 걸었다. 날씨도 아름다웠지만 보이는 산세와 아침 공기 모든 것이 완벽했다. 두 시간 정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트래킹 코스를 걸어 간월재 휴게소가 있는 데크가 있는 지점에서 충격적으로 아름다워 비현실적인 억새밭을 계속 쳐다보았다. 오히려 집에 와서 노트북을 통해 사진으로 본모습이 더 와닿는다고 해야 하나. 당시에는 여기저기 돌아보느라 풍경 과식 상태여서 정신이 자주 아득해졌다.
간월재까지 올라온 김에 간월산 정상도 가보자며 산을 올랐다. 온몸이 너 왜 또 등산이냐며 저항하는 듯했지만 나의 모든 사진의 얼굴은 웃고 있다. 그날 거의 16킬로미터를 트래킹 했는데 16 킬로그램의 백팩으로 훈련해서 인지 맨몸으로 걷는 건 호사로 여겨졌다.
철저 하게 계획된 여행에서는 미리 무언가를 준비하면서 기대를 하고 현실에서는 기대를 넘어서야 하고 예약시간을 맞춰야 하고 결산을 하면서는 합리적인 소비였음을 입증해야 하지만 즉흥여행에서는 그저 뭐하나라도 재미있으면 오케이!라서 행복해지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만족 찾기 풀가동 레이더를 안 써도 돼서 오히려 좋은 느낌. 예정에 없던 상황이 닥치더라도 오히려 좋아… 이러면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뭐든 즐길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