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 고인 물 보고 온 썰
이런 노래가 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에 쉬일 곳은 내… 산 정상... 아니고 산 아래 주차장뿐이네...
회사 워크숍으로 한라산을 간다고 했을 때 나를 제외한 모두가 한숨을 쉬었으나 매주 어디 올라갈 곳 없나 월요일부터 검색을 하며 100대 명산 챌린지 바람을 타지 않은 척하면서 14개 했다고 체크하고 있는 나는 개이득…이라며 마스크 뒤로 빙글빙글 웃음을 지었다.
2018년 2월에 난간 높이까지 눈이 쌓인 한라산 성판악코스 왕복을 하면서 원 없이 10시간 동안 눈 구경한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긴 하였으나 두터운 눈으로 인해 한라산의 식생이나 백록담은 보지 못했었기에 눈을 벗은 한라산을 가볼 계기를 내심 기다려 왔었다. 회사 워크숍이라니 적당히 혼자이면서 함께인 등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기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도 곧 회사 부장님이 될 징조인가.
07:30
원래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성판악 입구에서 안내원분께서 산에서 유의해야 될 사항을 알려주신다
준비운동도 좀 하고 설명도 좀 듣고... 이런 안전에 대한 유의사항을 듣다 보면 그냥 등산 안 가는 게 나을 거 같다는 느낌... 이불 밖은 위험해. ㅎㅎ
08:07
해발 800 지점에서 시작하는 성판악 코스는 조금만 완만한 숲길을 걸으면 900 고지가 등장한다. 야자 매트가 깔려있거나 나무 데크가 많아 걷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다.
08:56
속밭대피소까지는 무난히 도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 나는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는 것이 어렵지 않은 야외형 인간(?)이기 때문에 비나 쫙쫙 내려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가방 속에 우비가 있었다
10:50
오르는 길 내내 허리 높이 아래로 깔린 대나무를 양쪽에 둔 숲길을 걸었다.
이럴 거면 도봉산이나 한라산이나... 똑같지 않나.
진달래 대피소에서 꽤 오래 쉬었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관절마다 나를 그냥 죽여달라 애원했다.
11:46
지겨운 숲길이 끝나고 시야가 열린다. 누군가 한 명 계속되는 숲길에 기분 상하기 바로 직전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이렇게 구름 위에 있는 나 너무 멋진가...? 하는 착각으로 잠깐 위로받았다. 하얗게 질린 고사목들이 등장하며 너 진짜 많이 올라왔어... 공포 분위기 한번 조성해 준다. 고사목이 벼락 맞아서 이렇게 된 거냐 기후 위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냐 논쟁을 벌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네이버에 검색 한 번이면 끝날 것을, 핸드폰의 카메라 기능 외에 다른 기능은 잊게 되는 해발 1500미터 이상의 지점
12:01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고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숲길이 걷히고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한라산 아래의 경관은 꽤 볼만했다. 정상이 어디인지 보이니까 남은 거리가 보임에도 하산길인 등산객들에게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는 건 끊을 수가 없다. 지나 온 길 아래를 내려다보니 봉긋봉긋 솟아있는 오름들도 보이고 다만 올라가다 돌아보고 사진 찍고 올라보고 돌아보고 사진 찍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도움은 안되는데 계속 내가 올라온 등산의 실적이 궁금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계속 뒤돌아보게 되었다.
12:30
입산 5시간 만에 백록담을 만났다. 어떻게 보면 그저 우리가 그렇게 자주 오래된 사람을 놀릴 때 쓰는 단어인 고인물이 아닌가. 이게 다 조상 마케팅 효과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백록담고인물을 볼 수 있다던데. 곰탕만 보고 왔다던가 썰이 썰을 낳고 썰이 쌓여 이것을 보게 되고 덩달아 위로 3대까지 덕이 있다 칭찬받았으며 복이 있으세요… 라는 신림역 앞에서 자주 듣는 말까지 들었다.
정상까지 거의 다 왔다고 말하는 등산객들과 소요시간이 안 맞는 표지판은 4년 전과 똑같았지만 아무래도 경주 최 씨 조상께서 덕을 쌓은 게 이제야 밝혀졌나 보다. 3대가 덕을 쌓았다는 사람들 어제 한 시간 동안 백록담 정상에 있으면서 이삼백 명은 본 거 같은데 이런 날이 일 년 중 며칠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시대 때부터 덕이 넘치는 나라였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서로의 조상을 칭찬하며 바로쿡 라면 애 밥(비 화식)을 끓여먹었다. 라면 물과 비 화식 연료를 끓이는 물로 인해 여기서 대부분의 생수를 다 소진하였고, 정상에 2리터씩 넉넉하게 물을 가지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하산하면서 마실만한 양의 물을 얻었다.
14:00
처음 시작은 성판악 코스와는 또 다른 모습이 보여 다른 길로 내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무계단으로 이루어져 해발고도를 낮추는 마이너스 진도를 쭉쭉 쳐 나가는 느낌이라 금방이라도 산을 다 내려올 것 같았고 길옆으로 보이는 웅장한 산세들이 마치 절대반지를 찾아 떠나는 호빗이 된 기분이다.
14:52
나무계단, 나무데크길이 끝나고
먼저 너무 빨리 뛰어내려 가는 선두그룹은 놓쳤고
너무 천천히 오는 후미 그룹과도 멀어짐
어쩌다 혼자 걷게 되었는데
정상 인근에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나 싶도록 혼자 걸었다.
15:30
등산에 참여하지 않은 회사 사람들에게 계속 연락 오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내려오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아직 반도 안 내려온 것 같다고 하면 다들 너무 소스라 치게 놀라며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도저히 혼자 내려오는 게 심심해서 후미그룹을 한참 기다려서 내려오면서 대화나 좀 할까 했는데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도 계속 나무만 보면 말이 없어진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그것도 그렇고 우리는 이미 8시간 이상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로 대화할 내용은 별로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6:06
하필이면 혼자 있을 때 갑자기 안개 낀 숲을 만나서 멋진 사진을 한 장 건지고 싶었는데 지나쳤다.
16:15
그 이후로 계속 이어지는 하산길은 사진기록이 별로 없다. 우리가 매일 너무 좋은 순간만 사진으로 기록해서 고통은 잊는 것이라며 우리의 지금 표정도 남겨두자고 했지만 입은 움직이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16:25
매우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은 척하는 제주 1년 반 살이 중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고 있는 초등학생을 한 명 만나서 대화를 좀 나누며 내려오니 힘들지 않았다.
16:30
우리 중 누군가 돌밭을 아스팔트로 잘못 보고 주차장에 도착한 줄 알고 서로 좋아했다가 헛것을 봤다는 사실에 실망했고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 말하기 놀이를 하는데 다들 매연, 주차장, 교통체증 같은 것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육지에서 온 우리들을 위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도 제주도의 자연을 조망할 수 있는 카페와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음식점들을 만들어놨는데
우리가 산속에서만 10시간을 넘게 보내며 초코바와 라면으로 배를 채우는 건 제주도에게 너무 실례라는 생각도 했다.
18:17
결국 펩시콜라 라임 맛이 너무 그립고도 그리워하다 만날 수 없는 그리운 내 님이 되어 다시 미워질 때쯤
등산이 끝나게 되었다.
한라산은 경사도는 낮고 표면이 거칠지 않지만 20킬로라는 거리가 자연속에서의 사색... 을 넘어선 음소거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한라산이 용문산보다는 안 힘들다며 하산길의 3분의 1 지점에서 말하다가 거의 다 내려올 때쯤 생각이 크게 바뀌어 산중에 아무래도 한라산이 젤... 힘들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때는 다들 하고 싶은 말과 들을 귀를 잃은 상태라 딱히 말할 수 없었다. 오고 가는 길 재간둥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음에도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산은 힘들지 않다... 이런 등산객들이 후기로 남기는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그래도 누가 또 한라산에 가자고 한다면 나는 또 갈 것인가.
과연 그럴 것인가.
하... 다른 사람들처럼 절대 다시는 한라산 안 가. 라고 장담은 못할듯.
누가 가자고 가면 나는 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따라갈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