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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y 01. 2021

선생님도 고백받아보신 적 있죠?

이제는 과거를 모두 지워야 할 시간

  지난주 금요일에 경찰서에 다녀왔다. 남편이 자기가 살고 있지도 않은 집에 지난 2월 이사 전날 너무 추워서 부모님을 지하 주차장에 내려드린 걸 가지고 접근금지 조치 위반으로 신고한 건의 조사였다. 내 명의 집이고 내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고 증거로 가져간 열 가지 서류를 들이밀며 말을 해도 이놈의 조사관은 물었던 말을 묻고 또 묻는 게 아닌가. 별 것도 아닌 이 일로 세 시간 조사를 받고 경찰서 문을 나서니 진이 쫙 빠진 기분이었다.

  가정 폭력 신고자로 수년간 들락거린 여성청소년과에 외려 불려 가 조사를 받게 되다니, 말도 안 되었다. 가정 폭력 전과가 있는 남자가 소송을 당한 후 작정하고 거는 신고와 고소도 이렇게 성실하게 수사한다니. 화가 났다. 게다가 이 일로 경찰서에서 학교에 공문까지 보내 결국 교장 교감 선생님께 이혼 소송 중임을 말씀드리게 되었다. 교감선생님은 '혹시 우리가 도와줄 게 없겠냐'며 운을 떼셨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가운데서도 그렇게 밝게 지냈냐'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작년에 이어 또 이런 일을 당하는 내 처지가 스스로도 불쌍했던 참에 교감선생님의 눈동자를 보니 그만 울음이 터져버렸다. 교무실 옆 방송실은 그렇게 눈물바다가 되었다.




  어제 급식 후 보영이가 "선생님, 이거 비밀인데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라며 아이들끼리 있었던 일 하나를 알려주었다.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좋은 우리 반 남자 부회장이 한 여학생에게 고백을 했다는 얘기였다.

  "서은이가 얼굴도 예쁘고 하니까 좋아서 그랬나 봐요. 서은이는 인기 최고예요."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선생님도 고백받아보신 적 있죠?

  "어... 예전에 남편한테 받아봤지. 그러니까 결혼했지."

  그러자 갸우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자가 고백할 수도 있잖아요. 아, 근데 남편 분은 선생님처럼 좋은 분이랑 결혼해서 너무 좋으시겠어요."

  '보영아, 사실 선생님하고 남편은 지금 원수 같단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차마 밖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나는 그저 고개를 조금 끄덕여주었다. 내가 그에게 그렇게 귀하게 생각되었다면 지금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글퍼졌다.

  어린이집 원장님께 부탁해 아이들 사진을 받았는데 얼굴이 너무 어두웠다. 2019년에 남편이 강제로 두 아이를 친정과 시댁에 맡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시댁에 있던 첫째 얼굴과 너무 닮아있었다. 무슨 일일까? 나를 위해 남편을 떼어내기로 한 이 결정으로 인해 두 딸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냥 나에게 아이들을 보내주고 어차피 지금도 주말만 시댁에 가는 남편은 2주마다 내 집으로 와서 아이들을 보면 좋으련만. 뭐가 그렇게 꼬여서 연락도 받지 않을까.

  학교에서 가정폭력 의무신고대상자 연수를 듣는데 이런 말이 나왔다. 아이의 훈육과 성장에 가장 기저에 흐르는 기본은 바로 '부부의 행복'이라고. 나는 이미 그걸 주지 못하는 입장이 되었구나 싶어 두  딸에게 미안하고 미안했다.

  어린이집 원장님께 온 사진을 보고 나니 마음이 안 좋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정 기일 전에 탄원서를 적어서 제출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그가 무서워 주소를 알면서도 찾아가지 못하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것 밖에 없었다.




  요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주기가 어렵다. 지난 토요일에도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중  명이 연애했다 배신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남편과 있었던 과거의 일들도 그대로 생각되지 않고 점점 '지워야  나쁜 과거' 범주로 자꾸 기어들어간다. 우선은 그에게서 떨어지고, 그를  삶에서 완전히 지워야 한다. 이혼 소송은  번으로 충분하니까. 요즘의  모습은 흡사 물기가  빠져 손대면 바스러질  같지만,  또한 지나갈 거라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기쁠 것도 슬플 것도 결국 별로 없는  인생이라면  의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서글퍼지는 생일 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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