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작은 배드민턴 대회에 참석하고 난 후부터 발목이 아프다고 했다. 13층까지 오르락내리락, 하필이면 몇 주 동안 엘리베이터 교체공사 중이다.
화, 목 오전 8시는 배드민턴 동아리 활동이 있다. 발목이 아프니 당연히 못 가겠지 했는데,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는 게 아닌가.
- 발목 아프다며?
- 가서 앉아 있더라도 일단 가보게.
앉아서도 쳤는지 하교 후 또다시 발을 절뚝이며 들어온다. 배드민턴을 쳤단다. 공부방은 못 가겠다며 핸드폰과 넷플릭스 앞에 각을 잡는다. 그래 웬만하면 발을 안 써야 빨리 낫겠지.
다행히 수요일은 공부방 안 가는 날이다. 목요일 오전이 되었다. 오늘은 발목이 괜찮아도 절대로 배드민턴 동아리에 가지 말라고 했더니, 동아리는 방학했단다. 발 쓸 일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불안한 느낌은 뭐지.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하교 후 절뚝거리는 발목으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들어온다. 아니 차라리 집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놀다가 공부방으로 바로 가든가! 단전에서 올라오는 외침을 간신히 삼켜본다. 아침까진 괜찮더니 왜 또 아프냐니깐 축구하다가 친구에게 차였단다. 발목 아파서 공부방은 못 가는데 축구를 해? 목구멍에서 화염이 쏟아지려 한다. 축구는 왜 했냐니깐 발 괜찮아져서 했단다. 어쨌든 오늘은 또 공부방을 못 갈 것 같단다. 점점 화염에 휩싸이고 있다. 내일은 당장 학교가 끝나자마자 병원에 끌고 데려가리라 다짐한다.
학교 끝나면 바로 정형외과 가게 집으로 올라오지 말라고 일렀다. 그리고 수업 끝나면 바로 연락하라고까지 꼼꼼하게 말해놨다. 이렇게 콕 집어 말해놓지 않으면 엄마가 그런 말 안 했잖아?라는 황당무계한 소릴 들을 수가 있다.
'끝남'
오 두 글자, 꽤 길고 성의 있는 카톡이 왔다.
'버스 타고 병원 앞에 내리든가 아님 내가 학교로 데리러 가?'
'ㄴ'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뒷말을 기다리지만 역시나 부연 설명은 없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집 앞으로 감'
'ㅇ'
오케이 순조로웠다.
이 정도면 중딩 남아와 순조로이 대화하고 약속을 잡지 않았는가. 더 이상의 불통은 불허한다.
둘째 점심 차려준 후 이제 막 그리려고 집어 들었던 색연필을 부랴부랴 내려놓는다. 큰애가 집까지 오는 시간은 대략 15분 정도니 그전에 얼른 내려가야 한다. 차가 엘베 없는 지하 주차장에 있으니 지상으로 옮겨놔야 아들이 바로 탈 수 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13층을 내려간다. 이상하게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길고 지루하다. 올라갈 땐 심장과 허벅지가 터질 것 같긴 해도 운동이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버틸 수가 있는데, 내려가는 건 가도 가도 끝없는 계단뿐이요 아직도 6층 5층4층 3층, 왜 이리 1층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려가는 건 무릎에 무리만 되고 살이 빠지는 것도 아니라고 들어서 그런가 아이고 지루하다.
지하에서 차를 빼서 지상으로 나왔다. 다행히 아직 아이는 오지 않았다. 한시름 놓고 차에서 기다리는데 뭔가 싸하다. 생각해 보니 최근에 깔아놓은 패밀리 앱으로 위치를 볼 수 있다고 했었다. 앱을 보니 편의점에 머물러 있다. 왜지 왜일까. 너는 왜 미동도 않는 것일까. 패밀리 앱을 켜기 바로 전, 혹시나 해서 '엄마 집 앞 차 안에 있다'라고 카톡까지 보내놨는데 읽은 흔적은 있지만 답은 없다.
결국 전화를 걸어 본다.
- 어디야?
- 나, 편의점
- 왜? 엄마는 너 기다리는데?
- 나 친구랑 놀고 있는데?
- 야이띠 그럼 놀고 온다고 미리 말을 하든가, 너 기다리고 있었잖아. 더 놀 거야?
- 어
구시렁대며 13층을 다시 오른다. 둘째가 혼자 집에서 뭘 할지 모르기에 (그놈에 핸드폰) 일단 집에 돌아가야 한다. 마침 화장실도 가고 싶어도착하자마자 두꺼운 스웨터와 터질 듯한 청바지를 훌렁훌렁 벗어던졌다. 큰애가언제 올진 몰라도 집에 있을 때 외출복은 너무 거추장스럽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감'
감.감? 무슨 감? 지금 온다고?이렇게 금방 올 거였어? 스웨터를 다시 뒤집어쓰고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하며 내가 너무 착한 엄마 같다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향한 배려가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애를 제대로 키우고 있는 게 맞나 씩씩거리며 13층을 내려오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정언니와 통화 중이기도 하고 1층에 거의 다 왔기에 안 받아 버렸다. 흥, 너도 한번 답답해봐라.
만나자마자 왜 전화 안 받냐는 아들에게
- 얌마 넌 친구들이랑 놀다 올 거면 놀다 온다고 말을 해야지
했더니 1초도 쉬지 않고 바로 반박을 날린다.
- 엄마가 착각한 게 내 잘못이야?
야 너 말 준비해 놨지. 전쟁이다. 나도 다음에 할 말 준비해 놀 거다.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긴다.
그저 쉬면 낫는 거 아닌가 굳이 병원에 올 필요가 있나 했는데 그래도 역시 오길 잘한 것 같다. 가뜩이나 굳어있는 근육이 대회 나간다고 긴장했는지 특정 부분만 과도하게 써서 무리가 간 모양이다. 그러게 운동 전후로 스트레칭하냐고 몇 번이나 물었었는데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거 같다. 의사 선생님은 충격파 치료를 받으면 금방 좋아지는데 문제는 많이 아플 수가 있다고 했다. 아플수록 효과가 좋은 거냐고 걱정스레 묻다가,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치아 모양을 드러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아플수록 효과가 좋으면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병원에 자주 오는 것보다 빨리 낫는 게 낫지, 나는 어쩔 수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물리치료실에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충격파 치료는 3-40분 걸릴 거란다. 어쩐지 휘파람이 나오며 마음이 느긋해졌다. 이 순간을 브런치에 남겨볼 요량으로 앱을 켜고 글을 써 내려갔다. 문득 주변을 돌아봤는데, 어맛 아들 잠바가 떨어져 있네. 내 잠바는 떨어지지 않게 소중히 잘 안겨 있는데 말이다. 바로 주워줄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물끄러미 몇 초간 차가운 바닥에 아들의 외투를 벌세워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