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
어릴 때는 꿈을 이루지 못하면 무척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다. 멋지고 화려한 어른이 되지 못하면, 그저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무기력하고 지쳐 보이는 사람 중 한 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 따위 몰라도 좋은, 지나치고 나면 기억도 나지 않을 그런 시시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20대가 되고 조금씩 현실을 깨달으며, 인생을 수정해 나갔다. 어디 가서 금메달을 따거나, 노벨상을 받을 만한 사람은 되지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멋진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는 스마트폰이 세상을 바꿔나갈 무렵에 대학 생활을 했고, 그 시기에 개발을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든 적당한 시기에 좋은 기회를 만나기 쉽지 않은데, 내 인생에는 그런 운이 따랐다.
그렇게 나는 20대에 멋진 개발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멋진 무대에서 강연도 하고, 책도 쓰고, 실리콘밸리에 취직도 하는 그런 꿈을 꾸었다. 새파란 개발자가 상상할 만한 그런 멋진 일은 다 하고 싶었다. 덕분에 20대에도 어린아이처럼 반짝이는 꿈을 꾸었다. 개발자의 세계는 그런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멋진 원더랜드로 보였다. 열심히만 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했던 날들이었다.
나는 뛰어난 개발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열심히 해야 했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개발자들이 손에 꼽는 좋은 회사를 다녔으니, 나만 잘하면 될 것 같았다. 처음에 개발을 하며 느꼈던 순수한 즐거움, 창조의 기쁨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였다. 성장, 발전, 더 훌륭한 개발자. 그게 내 목표였고 삶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삶이 온통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자기 계발, 따라잡을 수 없는 새로운 기술들, 이해할 수 없는 일만 일어나는 회사,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업무들만이 내 삶에 가득 차 있었다. 남은 건 우울증과 공황 장애 같은 정신질환뿐이었다. 이대로 인생을 보내도 괜찮은가? 정말 그래도 좋은가? 스스로 그렇게 물을 때마다 절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정말 꿈을 이루면 행복해질까? 대단한 개발자가 되면 행복해질까? 그 질문에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굉장한 개발자가 된다 해도 자기 계발을 그만둘 수는 없을 테니까. 회사에 다니는 이상, 창의적인 일보다는 일정에 시달리고, 각종 스펙이 정해진 업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대단한 개발자가 되어 강의를 하고 책도 쓴다? 업무만으로도 벅찬데, 내 개인 시간까지 할애해야 하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가 헛발질을 하고, 개발팀에 퇴사 바람을 부는 걸 본 내 회의감은 더 분명해졌다. 유토피아는 없었다. 코딩의 즐거움 같은 건 잊어버린 일개 회사원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유토피아처럼 보이던 것은 사실 웃으며 일에 인생을 갈아 넣는 기괴한 가면극일 뿐이었다. 생산성을 높여준다는 새로운 방법론과 소프트웨어, 스타 개발자, 영어 이름과 킥보드, 그리고 지쳐버린 나. 거기서 모순을 느끼는 건 나뿐이었을까.
나는 환상을 보는 걸 포기했다. 그게 내 20대와 30대 초반을 비춰준 반짝이는 꿈이었지만, 거기에 남은 인생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대단한 개발자가 되지는 못했어도 오히려 후련했다. 멋지고 화려한 어른이 아닌,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래도 불행하지 않았다. 마치 버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제법 행복했다. 그렇게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꿈 하나를 내려놓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다.
꿈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던 시절도 있었는데, 꿈이 끝나도 인생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느 평범한 어른처럼 그걸 받아들이고, 반짝이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가끔 웃는다. 어떻게 보면, 나는 꿈이란 걸 너무 늦게 내려놓은 어른이 아닐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삶이 힘들긴 해도 즐겁고 행복하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시간들이 무척 재미있고 보람차다. 이제야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마음속의 불편함 없이 오롯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처음 개발을 했을 때처럼, 진땀을 흘릴 때도 있지만 가끔 짜릿하게 기쁠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젠가 경제적 곤란이 찾아오면 이 행복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감도 있다.
창작으로 생계를 꾸리기에는 나는 아직 풋내기이다. 아직 확실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늘 머릿속에 불확실함이 맴돈다. 과연 내게 창작만으로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는 재능이 있을까?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쌓아온 경력도 인정받지 못할 텐데? 그런 불안을 항상 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개발을 하고 싶지는 않다. 겨우 찾아낸 내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서, 이제는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싶어서 나는 계속 글을 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다시 회사에 들어가서 개발을 할지도 모른다고. 회사가 경력에 공백이 있는 개발자를 받아주지는 않겠지만, 만약 정말로 다시 회사에서 개발을 하게 된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개발에 손을 담그게 될까.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대로 개발과 상관없는 삶을 향해 흘러가 버릴 수도 있고, 어쩌면 다시 개발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개발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는 건, 10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삶의 의미를 개발에서 발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후련하게 무거웠던 꿈을 내려놓고, 나는 또 다른 방향으로 살아간다. 삶이 계속되는 한, 다시 헤매고 다시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개발을 뒤로하고 그저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걷는다.
개발자, 이제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