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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누가 먼저 손을 놓을 것인가?

The Ultimate Tug-of-War

주권은 국제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카드다. 국가들은 세계가 문을 두드릴 때마다 “방해 금지” 표지판을 내걸며 간섭을 차단한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갑자기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문을 활짝 연다.


나는 뉴욕 유엔 회의장에서 그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팬데믹 초기, 어떤 대표는 “보건은 순전히 국내 사안”이라며 개입을 거부했다. 하지만 백신이 부족해지자 같은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연대와 협력”을 외쳤다. 주권은 원칙이라기보다, 유리할 때 꺼내는 카드 같았다.


기후변화 논의는 이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은 섬나라 대표들은 마이크 앞에서 목소리를 떨며 호소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학교와 공항이 바닷물에 잠기고, 조상이 묻힌 땅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의 원인은 대형 산업국들”이라고, 그래서 국제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요 오염국들은 단호하다.

"우리 경제가 최우선이다. 우리 방식대로 할 테니 간섭하지 마라."


기후 변화가 국제적 문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책임과 해법의 주체가 누구인지에선 목소리가 갈라진다. “오염을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과 “우리 방식대로 감축하겠다”는 주권 논리가 맞붙는다. 협력의 요청 앞에서 주권은 언제나 대화의 종결자가 된다.


이 줄다리기는 식민 지배의 기억과도 닮았다. 과거 강대국이 식민지를 착취한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대가를 어디까지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란이다. 역사적 책임과 현재의 주권이 충돌할 때, 협상장은 쉽게 교착 상태에 빠진다.


보호 책임 원칙(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은 주권을 절대적 권리에서 책임이 수반되는 개념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대량 학살이나 전쟁범죄가 발생할 때 국제사회가 개입할 의무가 있다는 이 규범은 처음엔 국제사회의 양심처럼 받아들여졌다. 케냐(2008)와 코트디부아르(2011)에선 위기를 막았지만, 르완다(1994)와 시리아(2011~)에서는 강대국의 무관심과 안보리 마비로 무너졌다. 리비아(2011)에서는 정권 교체로 변질되며 신뢰를 잃었다. 국제사회는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정치적 계산 앞에서 번번이 흔들렸다.


보호 책임 원칙(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은 2005년 유엔이 채택한 국제 규범으로,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거나 대량 학살, 전쟁 범죄, 인종 청소, 반인도적 범죄가 발생할 경우 국제 사회가 개입할 의무가 있다는 개념이다. 이는 주권을 절대적 권리가 아닌 책임이 수반되는 개념으로 재정의하지만, 실제 적용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케냐(2008)와 코트디부아르(2011)에서는 외교적 개입을 통해 위기를 방지했지만, 르완다(1994)와 시리아(2011~현재)에서는 강대국의 무관심과 안보리의 마비로 인해 실패했다. 리비아(2011) 사례에서는 R2P가 정권 교체로 변질되며 국제적 신뢰를 잃기도 했다. 주요 논란은 선택적 개입, 강대국의 이해관계, 그리고 주권과 개입의 충돌에서 비롯되며, 실질적 효과를 위해서는 예방 조치 강화, 유엔 안보리 개혁, 그리고 군사 개입 기준의 명확화가 필요하다. R2P는 국제 사회가 대량 학살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지만, 강대국의 정치적 계산 앞에서 그 실효성은 여전히 도전받고 있다.


나는 안보리 회의장에서 한 독재국 대표가 차분히 말하는 모습을 기억한다.

“국가 주권은 신성하다.”


그의 발언은 외부 개입을 막는 방패였지만, 그 나라 안에서는 동시에 반대 세력이 체포되고 있었다. 서방이 인권을 이유로 개입을 주장하면, 중국과 러시아는 늘 같은 논리로 차단했다. 그러나 이들이 자국 주변에서 주권을 얼마나 존중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중잣대는 권위주의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국가가 난민 쿼터나 방위비 증액 문제에서는 자율성을 앞세운다. 국제 질서를 강조하던 국가가 자국 법과 충돌하는 조약 앞에서는 조용히 발을 뺀다. 결국 주권은 ‘불변의 원칙’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꺼내는 카드’다.


문제는, 오늘날 위기가 그 카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는 점이다. 기후변화가 가속화되고, 팬데믹이 반복되고, 국제 갈등이 격화되는 세계에서 협력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다. 협력은 이제 생존의 조건이다.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게임으로 바뀌었다.


실제 협상장에서 나는 이런 계산을 똑똑히 들었다. 한 대표가 말했다.

“협력은 이상이 아니라 보험입니다. 안 하면 우리도 위험에 빠집니다.”


경제 성장, 안보 보장, 기술 혁신 같은 실질적 유인이 있을 때 협력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반대로 규범을 무시하는 국가는 무역 제재, 외교적 고립, 금융 페널티라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주권과 국제 협력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달려 있다. 주권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글로벌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뉴욕의 회의장을 나설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가 먼저 손을 놓을 것인가?” 지금까지 국제사회는 위기의 줄다리기에서 서로 버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언젠가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늦게 손을 놓는다면, 그 대가는 훨씬 클 것이다.


Takeaways

주권은 권리이자 동시에 책임이다.

협력은 도덕의 언어가 아니라 생존의 계산이 되어가고 있다.

실질적 유인과 불이익이 균형을 만들어야 한다.


09 <국제법,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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