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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유엔에서는 모두가 평등한가?

Power Imbalances

by 유엔이방인 김상엽

뉴욕의 겨울은 차갑고 길다. 유엔 본부 3층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공기가 이미 기울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이크와 발언 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진 다지만, 누가 마이크를 잡느냐에 따라 방 안의 긴장도는 달라졌다. 초강대국 대표가 몸을 조금만 앞으로 숙여도 속삭임이 멈추고 시선이 모였다. 반대로 인구가 뉴욕 지하철 한 칸에도 못 미치는 작은 섬나라 대표가 발언하면, 서류 넘기는 소리와 낮은 대화가 곧장 뒤를 이었다.


모든 국가는 평등하다. 유엔 헌장의 서문에도, 총회 연설에서도, UN 홍보 브로셔에서도 마치 만장일치로 신봉해야 할 진리이다. 그러나 유엔에서 빠르게 깨닫는 진실이 하나 있다. 현실은 정반대다.


모든 대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


외교는 카지노 같았다. 테이블에는 모두가 앉아 있지만, 칩의 크기와 배당률은 애초부터 달랐다. 어떤 플레이어는 주사위를 던지기만 해도 이익을 얻고, 어떤 이는 불리한 패만 손에 쥔다. 그리고 그 무대의 최상단에는 P5—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가 있었다. 그들은 거부권이라는 ‘하우스 룰’을 쥔 채, 게임의 흐름을 단숨에 뒤집는다.


P5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SC)의 5개 상임이사국을 의미하며,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구 소련), 중국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거부권(veto power)을 보유하여 안보리의 주요 결정을 단독으로 저지할 수 있다. P5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국제 안보, 평화 유지, 핵 비확산 등의 문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안보리가 종종 마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P5 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인도, 브라질, 독일, 일본 등 새로운 강대국들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 요구가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안보리 개혁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기존 P5 국가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실질적인 개편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안보리를 수차례 마비시켰다. 오늘날에도 안보리 개혁 논의는 수십 년째 멈춰 있다. 인도, 브라질, 독일, 일본 같은 나라들이 새 의자를 요구하지만, 기존 P5의 이해관계 앞에서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헌장 조항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회의실의 현실은 다르다.


그 불균형은 유엔 정규예산(UN Regular Budget) 협상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부유한 국가는 “효율성”을, G77은 “투명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본질은 돈이 아니었다. 통제권이었다. 한 G77 대표가 말했다.

“최소한, 돈이 어디로 쓰이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 순간, 한 P5 대표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우리는 ‘유연성’을 선호합니다.”


그 짧은 문장은 사실상 선언이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결국 결의안 문구는 모호하게 다듬어졌고, 그 모호함은 P5가 이후에도 예산을 자기들 방식대로 집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유엔 정규예산은 유엔의 핵심 활동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사무국의 운영부터 분쟁 예방·인권 보호·지역 협력·공공 정보 발신까지, 조직의 기본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비용이 모두 여기서 나온다. 이 예산은 193개 회원국이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분담금으로 충당되며, 국별 분담률은 ‘지불능력(capacity to pay)’에 따라 3년마다 총회가 조정한다. 국민총소득, 인구, 외채 규모가 반영되고, 최빈국은 0.01%로 낮추는 반면, 최고 상한은 22%다. 이 정규예산은 평화유지 예산이나 유니세프·세계식량계획(WFP) 등 자발적 기여에 의존하는 기구들과 구별된다. 집행은 총회 제5위원회가 심사·승인하며, 매년 달력연도를 기준으로 운영된다. 결국 정규예산은 단순한 회계 장부가 아니라, 유엔 헌장이 부여한 핵심 임무를 안정적으로 이행할 수 있게 하는 국제적 합의의 상징이자, 가장 확실한 제도적 안전망이라 할 수 있다.


이 패턴은 무역에서도 반복된다. 작은 경제국은 WTO 규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반면 강대국은 관세를 부과하고 나중에 법률가들에게 정리시키면 된다. 조약 위반도 마찬가지다. 약소국이 어기면 즉각 제재가 따르지만, 강대국이 어기면 형식적인 성명 몇 줄로 끝난다.


답답한 건, 작은 나라들의 요구가 결코 과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특혜가 아니라 단지 공정한 대우를 원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테이블에서는 그마저도 과한 판돈이 된다.


국제법은 원래 약자를 지키기 위해, 강자의 횡포를 제어하기 위해 설계됐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 법이 강대국의 권한을 고착화하는 장치로 변질될 때가 있다. 게임의 법칙을 모른다면, 판은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된다.


그렇다고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칩이 적다면, 전략이라도 있어야 한다. 흐름을 읽고, 타이밍을 잡고, 때로는 테이블을 흔드는 것이다. 승리는 칩의 개수가 아니라, 흐름을 읽는 능력에 달려 있다.


나는 작은 나라들이 던진 절묘한 패를 몇 차례 목격했다. 완벽한 역전은 아니었지만, 방 안의 공기를 바꾸고 판돈의 향방을 잠시 흔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패시브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외교 무대에서 작은 승리란 언제나 그렇게, 불리한 게임의 틈새에서 태어난다.


Takeaways

국제 외교는 룰이 동일해 보여도, 애초부터 칩의 크기와 배당률이 다른 카지노다.

약소국의 요구는 단순하다. 그러나 기울어진 판 위에서는 그조차도 실현이 어렵다.

칩이 적더라도 전략은 있다. 흐름을 읽고, 순간을 붙잡는 자가 승기를 잡는다.


07 <속도를 줄여주십시오>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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