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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점까지 다녀오거라

The Role of Individuals

by 유엔이방인 김상엽

새벽 세 시 회의실의 공기는 밤새 식지 않았다. 커피 얼룩이 번진 문서 더미가 책상 위에 겹겹이 쌓였고, 서로 다른 언어와 억양이 꼬리를 물며 공간을 채웠다. 국제 협상은 늘 산을 오르는 것 같았다.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수십 번 멈추어야 했고, 정상은 늘 눈앞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칠레대표부에서 일할 당시, 유엔본부 건물개축(리모델링) 프로젝트 예산을 놓고 밤새 이어진 협상 테이블에서 그 사실을 절감했다. 긴장이 팽팽하게 감돌았고, 협상은 산을 밀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더디게 진행됐다.


유엔 본부 건물 개축 프로젝트(Capital Master Plan, CMP)는 국제기구가 스스로의 물리적 기반을 어떻게 재정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CMP는 뉴욕 유엔본부가 1950년대 지어진 이래 노후화로 인한 안전 문제와 비효율적 시설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대규모 개보수 계획이었다. 총예산은 약 21억 5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수차례의 비용 논란과 회원국 간 재정 분담 협의 끝에 2015년에 완공되었다. 회의실과 사무공간의 현대화, 에너지 효율 개선, 보안 강화가 이뤄졌고, 장애인 접근성 확대와 친환경 설계도 반영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CMP 사무국은 2015.6.30.자로 해산되며 임무를 마쳤다. CMP는 단순한 건물 보수공사라기보다, 유엔이 앞으로도 국제사회의 협상과 합의를 담아낼 ‘그릇’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한 사건이었다. 낡은 구조물이 새로운 기능을 품고 다시 문을 연 것처럼, 국제법과 외교 무대도 끊임없이 수선되고 진화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때, 한 태평양 섬나라의 젊은 대표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국가는 회의장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였고, 쥘 수 있는 카드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마이크를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예산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줄입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절차와 숫자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우리가 오르고 있다고 믿었던 길이, 사실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절벽 위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국제법은 겉보기에는 거대한 기계처럼 보인다. 수많은 조약, 약어, 기관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톱니바퀴의 집합처럼. 그러나 그 속을 움직이는 건 얼굴 없는 구조물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펜을 쥐고 초안을 다듬는 법률가
회의장 한가운데서 입장을 밝히는 외교관
무너져가는 합의를 붙잡기 위해 새벽까지 버티는 실무자


나는 그들의 지친 어깨와 붉어진 눈을 가까이에서 보아 왔다.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끈기가 국제법을 돌리고 있었다.


이 원리는 국가와 정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알파세대에서 MZ세대에 이르는 신세대는 이제 국제법의 ‘관객’이 아니라 ‘등반자’다. 파리협정이 성립한 것도 각국 정부가 갑자기 환경 감수성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인 시민, 소셜미디어에서 캠페인을 이어간 활동가, 기업을 압박한 소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협정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산 정상은 아직 멀리 남아 있다는 뜻이다.


기업 변화의 궤적도 같다. 글로벌 기업들이 인권·기후·윤리적 공급망을 경영 원칙으로 내세운 것은 도덕적 계시가 아니라 소비자의 압력 때문이다. 착취가 드러난 공장에서 생산된 옷은 더 이상 팔리지 않았고, 탄소 발자국을 무시한 브랜드는 외면당했다. 자본의 흐름이 변하자, 기업의 행보도 달라졌다. 이는 국제 규범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시민이 감시하고 압박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다.


인터넷은 이 등반을 더 빠르고 넓게 만들었다. 와이파이만 있으면 한 청소년이 정치 연설가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해시태그 하나가 수백만 명을 움직인다. 대량학살과 난민 위기 같은 주제가 실시간으로 전 세계를 휩쓸자, 정부와 국제기구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정보의 흐름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대응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일은 혼자서 완수할 수 없다. 변화는 한 세대가 완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기는 과정이다. 나는 협상장 안팎에서 늘 이 생각을 되새겼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이야말로 시대 전환기에 가장 위험한 발상이다.


"정점까지 다녀오거라."


루피에게 그 말을 남긴 레일리처럼 각 세대는 자기 힘으로 산을 오르되, 다음 세대가 더 멀리, 더 높이 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 국제법은 단순히 문서 속 규정이 아니라, 이렇게 이어지는 등반의 흔적이자 약속이다.


Takeaways

국제법의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제도보다 사람이다.

시민과 신세대는 관객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내는 등반자다.

한 세대의 등반은 정상에 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한 길 닦기로 이어져야 한다.


12 <참여하거나 지배당하거나>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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