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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빙판이어도 난 좌절하지 않아.

by 레알레드미 Dec 02. 2024

좋아하는 눈이 불운을 몰아오는 것이 싫었다. 아름다움이 빙판이 되어 누구라도 엎어치기 하고픈 심정이 되어 사람을 넘어뜨리고 악마가 되는 순간이 싫었다. 그리고 빙판의 눈물은 어떠한가? 녹을 때에도 지질하게 흙탕물과 섞여서 끝까지 더럽게 매달리기에 나는 순수한 눈에 불운이 섞이는 게 싫었다. 

나의 첫 직장은 택시회사 경리였다. 고작 며칠만에 잘려서 사회의 매운맛이 최루탄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곳이었다.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잘렸을까? 회사에서 잘린 일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하찮은 나를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든 사건이고 가장 극복하기 힘든 자괴감을 남긴 일이었다.  

취업준비생으로 그토록 고군분투했지만 겨울방학에도 나는 무직이었다. 사회로 나가는 자격증이 이토록 힘들 줄 알았다면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였을 것이다. 취업의 가장자리, 모서리, 아니 절벽에 다다라 후회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고 나날이 눈치가 보이는 집안에서의 삶이 절망으로 바뀔 무렵, 언니의 친구소개로 택시회사의 면접을 보았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규모지만 이름을 대면 알만한 택시회사의 면접이라 조금은 설렜다. 결과는 "내일부터 출근하세요."라는 말이었다. 나도 사회인이 되어 일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속으로 눈물이 났다. 이 세상에 내 힘으로 벌어먹을 한 뙈기의 밭이 생긴 것처럼 뿌듯했다. 

1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고 가야 했지만 출근해보니 이미 근무하고 있는 또래의 친구가 있었다. 회사에서 서로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미 근무하는 친구들에게 동기가 있다고 하니 참 좋겠다고 했다. 동기가 있으면 직장생활이 훨씬 편할 거라고 말했다. 남에게 할 수 없는 직장 내 사소한 이야기를 소통하고 일에 대한 고민도 같이 해결할 수 있으며, 저녁 시간에 같이 취미생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또래 친구인 P는 눈이 크고 얼굴이 수더분하고 순하게 생겼다. P는 호감형인데다 활달한 성격으로 소심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고 사무용품을 챙겨주었다. 누구에게 말 걸 주변머리가 없는 소심한 나는 의지할 사람이 생겨서 너무 기뻤다. 

사무실에는 부장과 과장 그리고 경력직인 언니 2명이 있었다. 사무실은 단촐하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같았다. 언니들은 친절했지만 일이 많은지 부산하게 움직였다. 부장과 과장님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외근이 잦은 것 같았다. 

사무실 옆의 가건물은 택시기사님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교대하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내가 그곳에 갈 일은 거의 없는 듯했다. 급여나 관련 업무에 대한 문서들을 원할 때는 택시기사님들이 사무실에 와서 사무직 사람들에게 요청하였다. 내가 출근한 날 몸집 커서 건달처럼 보이는 기사님이 사무직 언니와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상다반사라는 것을 P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분들의 목소리는 너무 크고 거칠었다. 우리 집에서 큰 소리 날 일이 없어서 그 목소리를 듣고 심장이 떨렸다. 기사님의 요구사항을 제지하는 경력직 언니들의 태도는 칼같이 단호하고 분명했다. 전혀 기죽거나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나도 이곳에서 베테랑이 되면 저렇게 변할까?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했다. P가 같이 가자고 해서 언니들이랑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집밥처럼 깔끔하고 맛갈난 반찬으로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따로 있었다. 식당은 택시 기사님들도 같이 이용하고 있어서 몇 분은 내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며 새로 온 직원이냐고 물었다. 나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다. 아저씨들은 그런 나의 반응에 더 이상 짓궂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존재감 없는 내게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식사 시간에 나는 전임자가 결근이 잦고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잘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리 중이라 아프다고 며칠씩 결근하는 게 말이 되냐?”며 S언니가 말하자 “하기야 그게 한 두 번도 아니니까, 이참에 사장도 정리해고 하려는 거겠지.” 라고 W언니가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네 전임자가는 성격이 못되서 잘 가르쳐주지는 않을거야. 그렇지만 어떻게든 잘 배워서 우리 같이 일하자.”라고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출근 둘째 날도 내 전임자는 인수인계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에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또래 친구는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나에게 친절하게 이것 저것 간식을 챙겨주었다. 내가 뭐라도 할 일을 나눠하자고 하면 “곧 인수인계 받으면 바빠질테니 그냥 편하게 쉬라”고 했다. 그 때 과장님이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고는 다급하게 부장에게 보고를 했다. 택시기사 한 명이 여자한테 성추행범으로 고소를 당해 경찰서에 잡혀있다며 합의를 해줘야 할지 그것을 의논하는 내용이었다. 그 택시기사는 이런 일로 여러 번 사고를 쳤는지 부장은 “잘랐어야 했는데 그놈의 정이 뭔지 봐주다가 골치 아픈 일에 엮였다”며 화를 내었다. “그 자식이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 하여튼 한 번 사고친 그런 종자는 꼭 말썽이라니깐요. 그렇지만 그냥 두면 회사 이미지에 먹칠을 할 테니 빼주긴 빼줘야 줘. 이번 달 월급이 지급 안됐으니 그것부터 차압하고 합의 봐주죠.”라고 과장이 말했다. “그 자식 이번에 경찰서에서 나오면 따끔하게 말해야겠어. 김과장은 그 자식 월급 얼른 차압하라고 S에게 서류 넘기고, 나는 오늘 사장님한테 보고해서 당장 잘라버려야지. 정말 이런 일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다니까.”라고 부장이 말하며 두 사람이 경찰서로 출발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런 택시기사와 한솥밥을 먹는 거친 이곳에서 내가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오후에 전임자가 출근했다.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언니들과 잡담을 나눴다.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칠 의향이 없는 듯했다. 회사를 잘리고 보니 여행도 시들했다면서 내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출근 안 해서 사장님은 많이 화나셨어?” “말도 마, 네가 회사 전화도 안 받고 잠수타서 기사님들 월급도 밀리고 정말 장난 아니었어.” “그러니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월급 좀 올려달라고 할 때 해줬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쥐꼬리 월급으로 내가 이 회사에 헌신한 게 얼만데. 하여튼 꼭 막장까지 가야 생각해주는 척 한다니까.” “그래서 정말 관둘거야? 어차피 이제 돌아와도 네 자리 없는데.” “내 자리가 있고 없고는 사장이 어떻게 나오냐에 달렸지. 나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서...”그녀가 말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P가 “저 언니는 여우야. 얼마나 제멋대로인데. 그래도 그게 다 통용되는 거 보면 세상이 참 이상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 그녀는 나를 무시하며 사무실을 제 방 드나들 듯 다녔다. 일부러 친분을 과시하듯 사람들과 잡담해서 나를 불안하게 했다.

사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퇴근시간이 1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사장님이 나보고 퇴근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서 나는 사람들이 퇴근한 사무실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었다. 이런 부당한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장님의 결정이 그녀에게 관철되고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틸 것이라는 희망을 세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그 용기가 힘을 잃고 미래가 불투명해질 거라는 불안과 초조함에 심장이 잔뜩 조여왔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그녀가 웃으며 퇴근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내 쪽은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머쓱해진 나는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퇴근하려고 가방을 싸는 나에게 사장이 집이 어딘지 묻고는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사실 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서 동행하게 되었다. 꿈이 뭐냐?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 이런 곳에서 일하는 건 재능을 썩히는 게 아니냐 등 나를 염려하는 듯한 말씀을 하였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를 인재로 인정하고 계속 쓰겠다는 의사표시로 생각되어 안심이 되었다.

다음 날 출근하니 부장님이 나를 부르더니 전임자가 다시 일할 의사를 밝혔고 지금 회사의 사정은 택시기사들의 월급을 지불해야 하는 때라서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이 절실하며 그게 초보인 나는 아니라는 요지였다. 며칠 일하고 한 달치 월급을 주는 통 큰 혜택을 누리고 회사를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어제 사장은 나쁜 소식을 전하는 악당으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나 보았다. 부장에게 그 임무를 떠맡기고 사장은 출근도 하지 않았다. 누구한테 내 입장을 설명할 기회조차 없게 되었다.

토요일인데 눈이 오고 있었다. 회사를 나올 때 갖고 나올 짐은 몇 개 없었다. 그냥 내 가방과 소지품들만 챙기면 이 회사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이었다. 토요일은 12시에 끝나고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P가 오늘이 마지막이냐며 울먹거렸다. 나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담담하게 오히려 가뿐하다는 듯이 P를 격려했다. 눈도 오는데 그냥 집에 가기 싫으니 여의도에 가보자고 했다. 회사에서 잘린 소식을 들고 집에 일찍 퇴근하고 싶지 않았다. P랑 여의도 롤러스케이트장에 갔다. 눈이 하얗게 쌓여 온 세상이 천국 같았다. 나만 세상에서 추방당한 느낌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장관에 슬픔이 배어들며 비장미가 느껴졌다. P가 회사를 나가더라도 자주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날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상황이나 처지가 너무나 달랐다. 만나도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 회사에서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인정 많은 P였다. 그 날 상황이 불편하고 슬펐지만 P의 말에 많이 웃어주었다. 내 마지막 모습이 좋은 모습이길 바래서 였다.

P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차장에 기댄 나는 안개처럼 낀 성애에 머리를 기댔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시려왔다. 입김을 불고 손으로 글씨를 썼다 지웠다. 지운만큼 보이는 바깥세상으로 눈이 오고 있었다. 더뎌지는 버스에서 흙탕물이 된 천덕꾸러기 눈이 나의 마음 같았다. 세상을 향해 깽판을 치고 싶은 마음. 그런 나쁜 마음이 내 마음에 스민 것이 슬펐다. 순수함을 잃는다는 것이 이런 건가? 눈이 녹아 눈물처럼 울먹이자 나는 내가 눈이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더럽혀진 눈은 싫었다.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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