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샛별 Jul 28. 2020

모래알 같은 하루, 유리알처럼

버티는 삶 대신, 참는 삶 대신 마음이 이끄는 삶 


    그건 꽤 조용하면서도 충격적으로 크게 들린 한 마디였다. 천둥이나 날벼락 (물론 벼락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같은 단어 외에 이걸 잘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달달한 냄새와 함께 익어가는 고기를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새 회사의 입사 동기가 한 말이었다.


    경력직에게 '동기'라는 건 묘하다. 신입사원 시절의 동기는 같은 시간, 같은 출발선에 있었기에 과거의 경험도 앞으로 겪을 일들도 비슷하다. 하지만 경력직은 서로 맡은 역할도, 기대되는 수준이나 가지고 있는 경험도 천차만별이다. 그래도 그 모호하고 옅은 안개 같은 끈, 우리를 묶는 그 동기라는 관계가 낯선 곳에 표류한 외지인이 느끼는 외로움에 꽤 큰 위로가 된다.




    4주 차에 접어든 새 회사에서  하나뿐인 입사 동기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직전 회사를 퇴사한 이유와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를 서로에게 묻는다. 온보딩 프로그램에서 서로의 독특한 경험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우리를 만나게 한 연결고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코로나 19로 지금의 회사가 전사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시기에 면접을 치렀다. 화상으로만 진행된 1,2차 면접에서 준비된 듯 답변했던 내용을 술 한잔과 함께 서로에게 나눴다. 내 긴 대답을 곰곰이 듣던 그는 7부쯤 채워진 소주잔을 들며 '그런 거 치고는 진짜 오래 다니셨네요.'라고 했다.


    '그러게요'라고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술잔을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내고,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 얼마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두 번째, 직전 회사에서 3년 8개월을 보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다 집에 돌아가는 길, 버스 창문에 비친 나를 보며 그 이유를 다시 한번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래 다녔을까'


    전 회사의 마지막 퇴근길, 로비를 빙 둘러보며 지난 3년 8개월의 시간을 떠올렸다. 입사할 때는 딱 2년 동안 많은 경험을 쌓고 다른 곳으로 떠날 계획이었는데, 왜 이렇게 오래 있었을까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들만 남는다는데, 시간은 로비의 안내데스크에 사원증을 반납한 그때부터 흐르는 듯했다. 아직 추억으로 포장되지 않은 여러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때때로 감옥처럼 느껴졌던 이 공간이 언젠가는 잘 포장된 선물 박스로 추억되기를 바랐다. 


    그 안에는 분해서 눈물 나던 순간들, 아쉬움과 답답함에 연거푸 술을 들이켜던 날들이 있었다. 이력서 업데이트나 구직활동은 생일처럼 매년 돌아왔다. 이력서를 새로 쓸 때마다 성장은커녕 점점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좌절감이 나를 가장 압박했다. 그게 싫어 떠날 작정을 했다가도, 정일까 미련일까 싶은 미묘한 감정이 날 붙들었다. 그렇게 버티고 참아가며 흐른 시간, 44개월. 몇몇 덩어리 같은 날들 외에는 기억도 나지 않는 모래알 같은 하루하루가 모여 44개월을 채웠다. 그 날들은 내 오늘의 어떤 부분을 채우고 구성했을까.


    모래알이 다 떨어져 버린 모래시계를 반대로 돌려 맞은 새로운 라운드다. 이번 라운드는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머물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어떻게 되든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알 한 알의 모래에 충실하고 싶다. 버티는 삶, 참아내는 삶은 이제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한 알의 모래 같은 하루지만 시간이 흐르는 대로 그냥 보내기는 싫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살면 모래알 같은 하루도 유리알처럼 빛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전 03화 출근하기 싫었던 어떤 여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