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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스 Aug 19. 2023

기브미 쪼꼬렛

우리 면내에 미군부대 트럭이 지나다녀요

언젠가부터 면내에 미군들이 군용 트럭을 타고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30년이 좀 안되었는데 트럭에 네다섯 명쯤 옹기종기 앉아서 지나가는 광경이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아직 자전거등교 하기 전의 일이다.)


초콜릿

"아빠~! 오늘 미국사람 봤어요~!"

"왠 미국사람?"

"아빠 군인옷 같은 비슷한 무늬 옷 입은 군인이요! "

"크 탔더나?"

"아니요, 트럭에 5명쯤 탔던데요, 쳐다보니까 우리한테 '헬로'라 어요~"

"잘~들어라잉~? 다음번에 '헬로우' 카거들랑, "하이~! 헬로우~!" 카면 된다잉? 그게 '안녕하세요'라는 소리다."

"아~, 하이! 헬로우~ 크크큭 ㅋㅋㅋ"

난생처음 써보는 영어회화가 괜히 웃기고 부끄러웠다. 너무 없어 보이는 한국식 발음이었다.

"또 미국 군인 아저씨들한테 '기브미 쪼꼬렛, 기브미 쪼꼬레또~' 라 카면 쪼꼬렛도 줄기라.  쪼꼬렛 주면 "옛 썰! 땡큐~!" 라 카면 된다."


우리는 하루 용돈이 300원이라 늘 배가 고팠다.

300원이면 빵빠레 하나 사 먹으면 끝나는 금액,  오뎅 하나 사 먹으면 100원이 남았다. 남는 100원으로는 땅콩캬라멜 5개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 아껴먹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질리는 것이다.  면내에 유일한 햄버거 가게인 '달라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큐빅감자(해쉬브라운)'를 사 먹으려면 무려 500원이라 하루 용돈으론 어림도 없었다. '달라스햄버거'에 들어가서  "큐빅감자 하나 주세요~" 라고 말하면 "큐빅감자 하나만?" 하며 싫은 기색을 하셨기 때문에 내 거금 내고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튀김기름 데우는 값도 안 나오겠다 하신 날도 있었다.  

영어 인사를 주고받으면 초콜릿을 받을 수도 있다니!

나와 남동생은 다음날부터 미군트럭이 보이면 쫓아갔다.

그들이 온다

저기 표적이 보인다.

뭔가 샬라샬라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고 웃는 모습이 왠지 여유 있어 보이는 날이었다.

차량이 워낙 느리게 공무수행 혹은 훈련, 아니면 드라이브(?) 하는 중이라 어렵지 않게 두 팔 높이 흔들며 인사할 수 있었다.

"하ㅡ이~!! 헬로우우~~!!"

"Oh, Hello."

파란 눈동자의 흰 얼굴 군인아저씨가 인사를 받아주었다.


동네 민방위 삼촌들은 우리한테 길을 막아 앉으며 쳐다보는 궂은 장난을 치기도 해서 아빠가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똥방위'라고 얘기하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아빠도 민방위 출신이다.)

그에 비해 오히려 이 외국인은 신사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다음 대사에도 화답해 주셨기 때문이다.

"저기..., 기브미 쪼꼬렛 ㅡ, 기브미 쪼꼬렛 ㅡ ^^"

"Chocolate, here." 

"와~! 진짜 초코렛이다~!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 옛 썰, 땡큐! 땡큐!"

얼굴이 온통 검고 흰자위만 희게 빛나는 군인 아저씨가 얇은 비닐포장지로 감싸진 네모난 초콜릿과, 초코맛 웨하스도 주셨다. 포장지도 고동색인 것이 누가 봐도 초콜릿이다. 거기에 흰색으로 온통영어가 적혀있는 완벽한 미제 초콜릿이다.


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6.25 전쟁 시절 국제시장 풍경인 줄 알지만 1990년대 초반의 미군은 여전히 미제 초콜릿을 어린 초등학생에게 베풀어 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긴 했다)



탄피


"아빠! 집에 오는 길에 이거 주웠어요~"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때 나와 남동생은  에 오는 길에  쇠 막대를 6개 정도 주워다.

분필 두께정도 되고 길이는 5cm 정도 되었을 것이다.  

왠지 못 보던 물건이 길가와 그 옆 밭에도 막 떨어져 있어서 소꿉놀이할 때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거 총알이네~! 어디서 났노?"

"총알이요? 집에 오는 길가에 많던데요~"

 아침 등교할 때는 분명 안 보였던 탄피가 하교 후 4km를 걸어올 때는  마을 입구에서 깊숙이 들어올수록 날마다 다 쓴 총알을 줍게 되었다. 총알 끝은 빠져나가고 뭉툭하고 홈이 파여있는 쇠막대만 남아 있는 것이다.

아빠가 고물상에 탄피 1개당 200원에 팔아봐야겠다고 철로 만든 분유통에 탄피를 적립하고 계셔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빈병 줍기 하는 마음으로 가득 가져왔다.

소중한 탄피를 양쪽 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주워 모은 뒤 집에 와서 분유통에 꺼내 넣으면 주머니가 검게 때가 묻어 있었다.

탄피 모아놓은 통이 대청마루 밑에서 먼지만 쌓이는 동안 미군은 훈련이 끝났는지 우리 면내에서 철수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긴 하다.

우리가 학교에 있을 시간에, 산속에 있다시피 한 우리 마을 길과 밭 밖에 없는 오솔길에서 주한미군 병사들이 훈련을 했다는 얘데, 밭농사하러 나오 마을 어른들이나 행인이 있었다면 목숨이 걸린 일일 수도 있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일어나고도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누가 잡아가도 보는 사람이 없을 깡시골에서 보호자 없이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5년 이상을 4km 거리를 등하교하고도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다녔다는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초반, 겁도 없이 미군에게 초콜릿을 구하고 탄피를 모았던  초등학교 2학년 생이었던 나의 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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