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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병원에 모자 쓴 사람들이 많은 이유

by 온 아무

새벽 3시 45분. 잠에서 깼다. 병원에 방문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새벽마다 잠을 설쳤다. 곤히 잠든 남편을 뒤로한 채 조용히 화장실에 들어갔다. 테스트기를 개봉했다. 결과를 기다리며 한 손에는 지난번 테스트기를, 다른 한 손에는 새로 한 테스트기를 들었다.


더블링. 1차 피검사 이후 2번째 검사에서 1차의 2배 이상 수치가 나와야 해서 흔히들 부르는 명칭이다. 나는 1차에 25가 나왔으니 이번에 최소한 50 이상은 나와야 했다. 임신테스트기로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테스트선의 진해진 정도를 보고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는 글을 보았다.


테스트기가 반응하길 기다리며 거울을 봤다. 얼굴이 푸석했다. '이 새벽에 몇 시간 더 일찍 결과를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가슴 한편에 묘한 설렘이 일었다.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마른세수를 한 뒤 테스트기를 다시 봤다. 흐릿한 두 줄. 지난번 테스트기와 비교해 봐도 별 차이는 없었다.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그만 자자.'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꿈을 꿨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악몽이었던 것 같다. 깰 때마다 끈적해진 피부로 기분 나쁘게 깨기를 여러 번. 또 늦잠을 잤다.


'망했다.'


허둥지둥 모자를 눌러쓴 채 병원으로 향했다. 걱정과 달리 병원은 비교적 한산했다. 접수 후 채혈실 앞에 섰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채혈을 할까. 계속된 채혈로 주사를 맞았던 부분마다 부풀고 멍투성이였다. 그나마 상태가 좋아 보이는 팔을 내밀었다.


"따끔해요."



채혈 후 진료순서지를 집고 일어섰는데 갑자기 주사자국 위에 붙인 밴드가 붉게 물들었다. 간호사분이 밴드를 때자 피가 왈칵 쏟아졌다. 불길했다. 밴드를 교체한 뒤 허둥지둥 채혈실을 나왔다. 주사 부위를 꾹 누르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10시 55분. 간호사분이 내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 선생님 표정을 살폈다. 모니터를 잠시 보시더니 정적이 흘렀다. 고민하다 내가 먼저 운을 띄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 지난번 25였고, 이번에 그래도 50 정도 이상이어야 되는데, 수치가 안정적이진 않네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니다."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레 내 눈을 바라보셨다. 내 뱃속에 착상한 배아가 잘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후 다시 진행한 피검사를 통해 화학적 유산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이번 결과가 나의 잘못이 아니며,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배아의 경우 얼마든 임신 유지가 안될 수 있다고 얘기했다.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언제 오면 될까요?"

"생리 곧 시작할 거예요. 이번 생리 말고 다음 생리 때 봅시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수납을 했다. 상담실을 들러야 할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받아야 할 주사도 없었다. 나오는 길에 남편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남겼다.


"잘 안 됐대."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날 테니까. 다 큰 어른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 순 없다고 생각했다. 7월의 햇살이 지독하게 따가웠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놀이터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보였다. 함박웃음 짓는 아이의 엄마도 보였다. 그 순간, 눈물이 만조(滿潮)의 밀물처럼 차올랐다. 뚝. 뚝. 집을 향해 내딛는 발끝마다 눈물 방울이 번졌다. 급하게 모자 밑으로 얼굴을 숨겼을 때, 알게 되었다. 난임병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자를 쓰던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집으로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흐릿한 두 줄에 희망을 품고, 주사를 맞아가며 병원에 다시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시간들이, 불안정한 결과에도 희망적인 사례를 찾아보며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던 나날들이 서글펐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목놓아 울었다.


나는 오늘, 화학적 유산을 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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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 글을 처음 보신 분들은 연속성이 있는 글이라 처음화부터 보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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