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왜 그때의 네가 나를 부르는 거야.
스물 하나의 지원과 스물여섯의 민성이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곳은 농구코트 내 벤치였다. 흐린 하늘 탓에 우산을 챙긴 민성이다. 지원은 웬만한 비는 그냥 맞고 만다. 민성은 우산 끝을 발로 툭툭 찬다. 지원은 그런 민성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무언가 민성이 말하기를 기다린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둘 사이에는 그저 습기 가득한 바람만 지나다닐 뿐이다. 지원은 어둑해지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민성의 흰 볼때기를 쳐다본 뒤 입을 연다.
- 오빠. 그래서 어쩔 거야?
- 응?
- 어쩔 거냐고.
- ...
- 답답하게 굴지 말고.
- 만나자, 우리.
- 알겠어. 이제 집에 가자. 축축해.
서른의 지원이 곤히 자고 있다. 민성은 지원의 오르락내리락하는 볼록한 배를 보고 있다가 문득 스물 하나의 지원이 떠올랐고, 그다음에는 스물셋의 지원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 지원이 썼던 편지의 문장 한 줄 한 줄이 편두를 강하게 짓눌렀다. 지원이 깨지 않도록 살며시 몸을 일으켜 서재로 들어갔다.
오빠, 미안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상황과 나 자신과 그리고 우리가 마음 아파. 너무 울었는지 따끔거리는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지만,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생각들이 지나치게 무거워서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이렇게 편지를 써.
잘 알고 있지? 나의 세상 외에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항상 눈꼴 시려울 만큼 이기적이고 어리다는 것을. 지금 누구보다 내게 힘이 되어주는 건 오빠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나는 그것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더 깊숙이 파고들어서 아예 오빠의 어린애가 되어버리려고 하나 봐. 이런 나를 그대로 받아주기엔 오빠 역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비린내 나는 청춘일 뿐이고, 누구나 그렇듯 항상 사랑받고 싶은 영원한 피터팬인걸.
나는 계속 요구하는 사람일 거야. 힘들수록, 무서울수록, 아플수록, 외로울수록 다른 어떤 문제와 조건도 따지지 않고 내 힘듦과 두려움, 아픔과 외로움만 그대로 바라봐주고 품어주기만을 요구할 거야. 이루어질 수 없는 욕심인 줄 알아. 하지만 나는 오빠를 잃은 후에도 여전히 욕심쟁이 어린애로 남아있겠지. 헌신적인 사랑에 목마른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결핍을 채워줄 사람을 찾아서 헤맬지도 모르고. 죽음의 문턱에서 눈을 깜빡이면서도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 아, 나는 내 일평생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구나. 나는 딱 이 정도로 못됐고 이기적이라, 따뜻한 오빠를 충분히 아프게 하기에 제격인 사람이야.
우리 헤어진 후에 나는 매일 궁금해할 거야. 오빠가 앞두고 있던 시험들은 만족스럽게 끝이 났는지. 환절기마다 콧물을 줄줄 흘리던 오빠가 더욱더 추워지는 날씨에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 들어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취미는 없는지. 오빠의 스물여덟이 지나고 스물아홉에 대해 묻고 싶어지자마자 나의 스물넷도 조잘거리고 싶어 질 거야.
그러면 이른 새벽부터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바람 하나를 붙잡을게. 그리고는 그 바람의 귀에다 대고 한 시간이 넘도록 참새처럼 쫑알거릴 거야. 그리고 그 바람을 오빠에게로 보낼게. 온종일 오빠의 귓등을 스치며 내 길고 긴 이야기 그대로 전해주라고.
나는 정말이지, 내년에 다가올 오빠와 나의 봄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향기롭고 따뜻하길 바라. 그래서 이렇게 아프더라도 더 이상 내 욕심으로 사랑스러운 오빠를 망가트리는 나쁜 짓은 그만두고 홀로 서서 단단해지고자 해. 우리가 함께 꿈꿨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남은 것들은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또 약속하고 반드시 지켜나가며 빛나는 사람이 되어가자. 가까스로 안녕을 말하며 연필을 내려놓을게. 언제나 예뻤던 나로만 기억해 줘.
민성은 지원의 이별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을 읽었다. 단어를 문장을 단락을 질기게도 곱씹었다. 반듯하게 접어서 봉투에 넣고 '추억상자'에 담아 서랍 깊숙이 숨겼다. '추억상자' 속에서 이 편지는 숙성되고 있다고 민성은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