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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Jun 09. 2024

고집의 오렌지 주스 (1)


#고집의 오렌지 주스


병원에서는 늘 소독약 냄새가 난다. 누구나 느꼈을 특유의 냄새다. 그것 외에도 다른 냄새를 맡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사실 같은 현상에 대해서 인간이 가지는 미각, 후각 등의 감각은 저마다 차이가 있어서 이상하게도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오늘도 병원에서 나는 냄새를 두고, 응급실의 소대장으로 여겨지는 최고집 선생은 제때 정리를 하지 않은 의국 냉장고에서 나는 냄새라고 주장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무언가 썩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건 정말 최악입니다. 이런 걸 먹다가는 다들 환자를 돌보기도 전에 의사가 먼저 환자가 될 겁니다.”


고집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그걸 바라보는 형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석은 사실 냉장고에 뭘 두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좀 정리를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 오렌지 주스를 마신 분은 자진신고를 부탁드립니다.”


형석과 민영 밖에 없는 응급실 의국의 휴게실이었지만, 고집 선생은 마치 모두에게 말하듯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마치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의 조회 말씀 같은 분위기였다. 굳이 따지자면, 사실 최고집의 말이 틀린 것은 하나 없다.


“게다가 요즘은 병원에서 낭비가 너무 심해요.”


그가 늘 달고 다니는 그 말이 가장 문제였다. 병원에서 낭비가 심하다고 직원들에게 의료비품을 아껴서 쓰라는 말을 자주 하기 때문에, 고집의 좋은 주장도 이상하게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


“강철 선생님은 오셨나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최고집 선생의 질문에 응급의 민정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원래 민정은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존재였다. 오로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의사였다. 사실 어디에나 이런 캐릭터는 필요하다. 인간관계를 잘 돌아가게 하는 유형의 직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일을 우선으로 하는 직원도 필요한 법이었다.




강철은 이미 수술실에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검사가 필요하겠군요. 혈액형 체크 하고, 일단은 왼쪽 다리를 촬영해야 합니다.”


약물은 이미 투여되고 있었다. 전형적인 골절 환자였다.


“겐타마이신도 추가해 주세요.”


환자는 축구를 하다가 다친 모양이었다. PSG 생제르망의 유니폼을 입은 환자였다.


“맥박 상태는?”


“뭐 다 정상인데요.”


형석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형석이 오늘따라 퉁명스러운 이유는 1분 차이로 지각을 해서 벌금을 냈기 때문이었다. 어쩐 일인지 지각대장으로 유명한 강철 선생은 요즘 들어 지각하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대동맥은?”


“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미스터 시니컬, 형석 선생님! 지각 문제는 잊어버려. 나처럼 그게 일상이 되면 병원 복지에 공헌한다고 생각을 전환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아이고, 선생님.”


형석은 강철에게 이미 마음을 읽히고 있었다.


“일단 문진부터 제대로 마쳐주시게나. 나는 잠시 옆에 수술실에 좀 가볼 테니까.”


“네, 사부님!”


형석은 미래의 축구국가대표 꿈나무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디 다른 데 다친 곳이 있어요?”


“복부도 좀 부딪힌 거 같아요.”


“알레르기나 복용하는 약은요?”


늘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만, 이 질문들은 항상 소중하다. 개인에 대한 아주 사소한 정보 하나하나가 나중에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 건 없습니다.”


그 사이에 민영이 다가와 복부를 촉진했다. 수술실의 시스템은 언제나 더블 체크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훌륭했다.


“복부는 괜찮은 거 같네요. 정형외과에서 이제 맡아주시면 될 거 같은데.”


그 사이에 강철도 어느 틈엔가 돌아와 있었다. 골절된 다리에 약간의 출혈이 있었고 여기에 드레싱을 시작했다. 한마디로 수술실은 협업의 공간이었다. 전공의들에겐 각자 전문분야가 있지만, 그 전문분야만 알고 있어서는 절대 안 되는 직업이 바로 의사였다. 기본적으로 다른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 자신이 놓치고 있거나 환자의 다른 고통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형석이 선택한 응급의학은 한 마디로 잡다한 의학의 기본지식을 담은 백과사전 같은 존재여야 했다.




“위산 분비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 일단 시메티딘 처방하죠.”


강철 선생은 지시를 내렸다. 바로 그때.


“그거 너무 과한 거 같은데요.”


최고집 선생이었다. 항상 반대의견을 달고 다니지만, 때로는 일리가 있는 말을 골라하는 존재.


“아뇨. 수술 중에 토할 경우를 대비하는 게 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환자가 당장 수술할 건가요? 위에 수술이 밀려 있지 않나요?”


갑자기 강철 선생과 고집 선생의 이상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토사물이 허파에 들어가는 경우가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그런 경우는, 글쎄요.”


일단은 강철 선생의 판정승으로 끝난 대화였다.




강철과 형석은 잠시 휴식을 하기 위해 의국 휴게실로 돌아왔다.


“아, 이런 날엔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하는데.”


그러면서 강철 선생은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서 들이켰다.


“어어?”


형석은 그 주스가 최고집 선생의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려다가 관두었다. 괜히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난리가 나서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사건이 전개되면,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강철 선배를 존경하기는 하지만, 그는 외과전공의이고, 이 주스 사건의 가해자이며 반면에 고집 선생은 짜증 나는 구석은 있지만 응급의학의 직속선배이며 명백한 주스 강탈사건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아, 역시 비타민 보충은 오렌지라니까!”


강철 선생이 갈증을 해소한 목소리가 투명할 정도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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