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쯤 모르는 사람과 부산에서 만났다. 바다는 내게 늘 누군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는 존재였고, 바다에만 가면 그런 시간이 재연될 것 같았다. 무작정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조현병 난치 판정을 받고 사나흘에 한 번씩 백혈구 수치를 확인하며 주치의가 처방하기 두려워하는 약을 먹고 있던, 그저 그런 날들 가운데였다. 유서를 쓰다 엄마에게 들켜 폐쇄병동행이 결정돼 답답한 마음에 세진을 팔아 부산으로 혼자 떠났다. 죽으려던 게 아니라 먼지 쌓인 시간을 한 번 털어내 깨끗하게 만들고 싶었다.
있는 힘껏 치장하고 떠났던 기억이 난다. 살이 찐 탓에 원하는 라인이 나오지 않아 평소에 입던 치마보단 좀 길었다는 것이 흠이긴 했지만. 또 높은 힐을 신고 진하게 화장하고선 터미널에서 택시를 무작정 탔다. 가장 가까운 바다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택시기사가 백미러 너머로 나를 흘깃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본능적으로 전화기를 들어 야, 빨리 나와, 내뱉었다. 해질녘 바다는 슬펐다. 나는 노을이 너무도 싫었다. 오늘의 시체 같단 생각에 무작정 무너졌다. 사는 내내 그랬다.
살갗으로 모래알이 우글우글 소리를 질러댔다. 마냥 앉아 있었다. 숏컷을 한 웬 여자가 다가와 내게 왜 우냐고 물었다. 의아했다. 울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얼굴만 빤히 쳐다보자 웃으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비치는 무릎이 시려 보였다.
"바람맞았죠? 나도 친구가 갑자기 못 나온다고 해서."
"저 만날 사람 없었어요."
"이제 나 만나서 과거형으로 말하는구나?"
마치 어제 본 사이처럼 이야기하는 여자가 웃겨 나도 모르게 같이 웃어버렸다. 만날 사람이 생겼으니 이제 울음을 그치라는 말을 하기에 나는 울지 않았다고 화를 내듯 답하자 그럼 이제 울면 되겠다며 기뻐했다.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며 통성명을 하고, 빠져나가는 파도를 바라보며 술을 먹기로 했다. 들어선 술집엔 온통 예쁘게 꾸민 여자들 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레즈비언바였다. 내가 술집 분위기를 살펴보는 듯하자 여자가 대뜸 먼저 알려준 사실이었다. 만나기로 한 친구가 여자친구였어요? 내가 묻자 여자는 호쾌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했다. 남자 없이 술 먹는 법을 알려줄게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예쁜 이름을 가진 칵테일을 주문했다.
여자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언니였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고, 결혼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오냐는 나의 질문에 여자는 자신은 성별을 따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테이블에 놓이는 칵테일을 마셨다. 나는 왜 아직도 술이 좋은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지만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술은 꼭 사랑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살면서 또 얼마나 많은 곳에서 사랑을 발견할지 두려웠다.
"나랑 평생 모르는 사이 해요."
여자가 처음 옆에 앉을 때 지었던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왜 서운한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왜냐고 물었다.
"그래야 동생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왜 저한테 이렇게 하세요? 여자랑 자보고 싶어요?"
"나 결혼할 남자 있다니까?"
"그런데 왜 그래요?"
"나는 예쁜 것을 구원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결혼도 그래서 하는 거예요."
칵테일로도 취할 수 있구나, 생각하며 내가 여자에게 물었다.
"구원에 뜻이 여러 가지가 있는 거 알아요?"
"그걸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지 몰랐네."
"그중에 어떤 뜻이에요?"
여자는 대답하는 대신 내게 떡볶이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구원히 구원하겠단 뜻이에요."
나는 여자의 전화번호를 받았고, 우리는 잠들지 않는 밤을 보냈다. 처음 남의 작품을 베껴 전국 백일장에서 대상을 받고 억지로 글을 쓰기 시작한 열 살 무렵부터 며칠 뒤면 폐쇄병동에 들어가기까지 나의 시간을 들으며 여자는 한 번도 놀라거나 되묻지 않았다. 여자는, 아니 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