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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Jun 12. 2019

당신에게 향하는 그 오솔길을 사랑합니다

나는 왜 제프리 바와를 사랑하는가?

이 못살고 가난한 나라에서 내 생애 최고의 건축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휴일이면 그가 지은 호텔을 찾아 열대의 끈적한 습기 속에서 늘어지는 여유를 즐겼다. 코코넛 나무가 우거진 바닷가 수영장에서 게으른 하루를 보내는 일이란 정말 환상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스리랑카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야말로 바와의 건축에 푹 빠져 지냈던 셈이다. 

마치 세런디피티의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마치 어린아이가 신기한 현상에 집중하듯, 죄 많은 순례자가 오랜 여행길에 오른 듯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와의 흔적을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그렇게 오랜 방황과 혼란의 세월을 끝내고, 너그럽고 지혜로워진 바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의 말에 답해야 했다. 


<제프리 바와의 루누강가>


당신에게로 향하는 그 오솔길을 사랑합니다

바와의 건물로 향하는 그 볼품없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오솔길들을 사랑한다. 그 남루한 작은 길을 걷는 동안, 바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 그 작고 형편없는 길, 포장이 되지 않아 먼지만 풀풀 날리는 그 길을 걷는 동안, 허허벌판이 등장하고 작은 곤충을 만나고 열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을 만난다. 그리고 스리랑카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도 마주하게 되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말이 통하지 않아 금방 웃음으로 마무리되고 말지만,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기에 좋았다.

때로는 우리를 그저 수없이 많은 나무들만 지루하게 지나쳐가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마치 수행자가 오늘의 목적한 곳을 찾아가듯 그 길을 묵묵히 걷곤 했다. 설사 그 길의 끝이 실망으로 이어질지라도 말이다. 끝임 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그의 공간들, 그것이 바와의 매력이다. 


<루누강가>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템플 트리의 정신없는 나뭇가지들도 좋았다. 그 나무를 만나게 되면, 나는 그저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시선을 고정시켜 쳐다만 보길 반복했다. 말없이 넋을 놓고 있으면, 뭐랄까? 내 머릿속 오만가지 사념들이 뻗어 나와서 만들어진 줄기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사념의 줄기들을 보면서 나는 이제 생각을 멈춰야 할 때라고 느끼곤 했다.


<루누강가 정원의 템플트리 나무>


바와의 공간에는 사념과 시간이 멈춘다. 대신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건 마치 어릴 적에 어머니가 상처를 향해 솔솔 바람을 불어넣어주던 것처럼 편안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지독히도 조용한 공간에서는 나무와 풀들이 스치는 소리조차 강렬하게 들린다. 이곳에선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마치 바와가 만들고자 했던 파라다이스로 숨어 들어와 어지러운 세상과 등지고 숨을 토해낼 수 있게 된 것만 같다. 

바와가 열어 둔 공간을 통해서 들어온 바람과 햇빛과 초록 냄새가 함께 화학작용을 일으키길 반복한다. 머리는 생각하길 멈추고 근육은 긴장하길 멈춘다. 그리고 내 몸은 그 공간들 속에서 부유하며 떠돈다. 이곳에서 나는 조용히 내면으로 사그라지는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펼쳐놓은 광활한 자연 앞에서 겸허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저 존재하되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되길 연습했다. 그렇게 어쩌면 조금은 자연이라는 거대함 앞에서, 부분으로서의 나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보잘것없기에 행복한 가치를 담은 나를 발견하곤 했다. 


바와가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그의 공간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그건 서울이 내게 건넨 적이 없었던 독특한 경험이었다.


<제프리 바와의 칸달라마 호텔>


도시는 욕망하는 인간들의 신이 되었다

화려한 도시의 겉모습에 이끌려 내 발로 들어온 서울이었다. 그곳에서 이제 나는 많은 질문들을 던지려고 한다.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 속에서 우리는 왜 외로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흥을 즐기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게 많은 말들이 공기 중에 오고 가고 있음에도 말이다. 


편하자고 만들어진 도시, 편리하게 설계된 아파트 속에서 왜 우리는 늘 피곤할까?
사람을 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끝없이 발전하는 기술들 속에서, 왜 나만 정신없이 바쁜가? 
도시는 그렇게 거대해져 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작아져만 갈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달리고 있는 걸까?


쏟아지는 질문들… 나는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다.

<네곰보의 아이들>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소망한다

언젠가 한국에서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막 2년 차가 되어가는 한 외국인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괴롭기 때문에, 타인도 같이 괴로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아. 마치 나 혼자 괴로운 것보다는 차라리 누군가와 같이 괴로운 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지."

이놈이 한국을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그저 내 사랑하는 조국을 깎아내리려고 험담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일이 녹록지 않으니 가끔씩 쏟아내는 푸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말에는 단지 푸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다 함께 행복할 생각은 안 하는 거니?”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질문은 아주 단순하지만 생각의 거리를 던져주었다.

그의 말이 맞다! 왜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줄을 모르는 걸까? 이방인도 이처럼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를 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이방인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원한다. 내가 불행하기에 타인도 같이 불행하기를 바란다. 애석하게도 그리고 어리석게도 주변의 아는 사람이 처한 딱한 소식을 듣고는 우리는 작은 위로를 얻는다.

우리는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러려고 노력한다. 

그래! 이 지랄 맞은 세상에서 나만 불행한 게 아니었어.

그렇게 우리는 희미하게 사그라지던 힘을 다시 낸다. 그리고 다시 세상 사람 모두가 불행하길 바라는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너와 나 사이의 공간에는 무엇이 있을까?

서울이라는 거대한 공간은 이미 우리의 본모습을 갉아먹고 있다. 우리는 우리네 삶을 어쩌지 못한다. 도시는 삶이 절박한 자들의 욕망을 먹고 자라난다. 우리는 그저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릴 뿐이다. 그저 세상에서 나 혼자만 불행한 사람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도시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이 되었다. 


나의 공간에는 무엇이 있을까?
너의 공간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너와 나 사이의 공간에는 지금 무엇이 있을까?




그동안 <너와 나의 공간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구독하고 좋아해 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 에피소드를 끝으로 이번 연재는 마무리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공간들을 가난한 나라, 스리랑카의 건축가 <제프리 바와>의 공간을 순례하며 느낀 점들을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답을 드리고자 쓴 글들이 아닌, 우리가 사는 공간에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시고, 또한 비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곧 전자책으로 발간될 예정입니다. 책에는 웹매거진의 특성상 줄여 쓴 글을 전자책에는 조금 더 풍성하게 담겼고, 사진도 더 많이 넣었습니다. 출간이 되는대로,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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