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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r 21. 2024

그럼에도 결제 하시겠습니까.

공항 편

    그 한마디로 설렌다. 답답하고 지루한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를 들여놓는다. 입장과 함께 마음이 붕 떠버리고 설렘을 가득 실은 채로 구름 위를 날아간다. 맞다, 이곳은 바로 공항이다. 이보다 설렘을 가져와 마음을 몰랑거리는 게 있을까. 간지러운 깃털이 귓속에 들어간 듯, 어깨가 움찔거리고 입안 침샘이 가득 고여 시큼함이 목 넘김 하는 곳, 그곳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감정을 잠시 되돌아감기 한 뒤, "아이와 함께"라는 말을 덧붙여보자. '아이와 함께 공항 이용하기' '아이와 함께 해외여행'만 검색해 봐도 피곤한 준비물이 뒤따른다. "어머님, 잠시만요. 지금 이 짐이 가당키나 한 줄 아시나요? '혹시'라는 걱정 인형이 탑승 안 했습니다."라는 두렵게 친절한 안내가 뒤따른다. 아이와 한국을 벗어난다면 설렘 대신 만약에 라는 상황에 맞는 각종 비상품을 준비해야 한다. 기내에서 있으니 비상 물통과 막대사탕, 색칠 공부, 퍼즐, 스티커 북, 담요, 다운로드와 배터리가 충전된 태블릿과 헤드셋. 뭐가 있더라.. 간단히만 챙기려던 기내용 에코백은 이미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 unsplash

    드디어 공항 대기실에 입성하지만, 아직 수많은 관문이 남았다. 눈앞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봐야 하는 아이의 절대적인 의견 때문에 텅텅 빈 좌석을 내버려두고 각종 항공사의 비행기를 구경한다. 차마 "엄마, 아빠는 궁금하지 않아."라는 말을 뱉진 못하고 주유하는 비행기, 차고지로 향하는 비행기, 기내식을 싣는 비행기를 보다 보면, 아이와 함께 빠져들기도 한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진다. 영유아를 동반한 가족은 탑승 우선권이 주어지는데, 그들의 고단함이 묻은 얼굴을 살펴보면 이제 막 여행을 떠난다기보단, 이미 모든 여행을 마친 피로감에 가깝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보부상 같은 짐을 챙긴 채로, 여권과 탑승권을 확인하고 유모차를 맡기다 보면 '돈 내고 사서 고생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지 않을까. 그나마 이륙과 함께 잠이 들면 '오늘 자 효도'는 다한 것이다. 더 이상의 효도를 바라서는 안 되며, 제 할 일 해낸 아이를 기특하게 바라봐야 한다. "고맙다, 아가야. 도착해서 사고 싶은 장난감 하나 더 사줄게." 

    영유아 동반 가족이 가는 목적지는 특별한 이유를 제외하곤 비슷하다. 가까운 거리로 제주도, 오키나와, 괌, 베트남 등이 있고 좀 더 간다면 동남아시아의 작은 섬들이리라. 다른 탑승객 역시 비슷한 사정이니 우는 아이가 이해 가지만, 모처럼 쉬러 가는데 비행기에서 내내 우는 소음을 견디기란 당장 마려운 소변 참기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같은 부모로서 아등바등해 보지만 마음까지 감당하기는 역시 쉽지 않다. 밤 비행기나 새벽 비행기를 이용하다 보면 잠을 자며 시간을 아낀다는 장점도 있지만, 애매한 시간에 도착해서 체크인 할 때까지 되려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졸린 아이는 이미 칭얼거림이 한도를 넘어서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프런트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면 기름진 얼굴은 짜증이 덧입혀진다.

    그래도 도착했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떠나왔다. 이제 날씨만 도와준다면 우리의 해외여행은 고단함은 모두 잊은 채 즐거운 기억만 안고 다음 여행지를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 unsplash

    

    아이를 낳기 전엔 몰랐다. 그 무엇이 됐든 아이와 함께라는 조건을 괜히 검색해 보는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호텔도 아이들이 먹을만한 조식 메뉴가 없다면 그림의 떡이고, 홀로 즐기는 루프탑은 꿈도 못 꾼다. 그저 호텔에 딸린 수영장 오픈 시간과 튜브, 구명조끼, 선베드 렌트가 우리의 우선순위다. 이곳이 한국인지 외국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한국 사람에 둘러싸여 수영하다 보면 티켓값과 호텔비가 물에 젖은 채 두둥실 떠다닌다. '아, 이러려고 성수기 요금의 배를 주고 떠나왔구나.' 

    한국에 도착해 카드 영수증을 확인하면 우리의 짧고 강렬한 휴가가 현실이었음을 직시하게 된다. 여행을 다녀왔지만, 남은 것은 뜨겁게 댄 화상자국과 어깨를 짓누르는 피곤함이다. 여독을 풀지도 못한 채 빨래 더미를 세탁기에 밀어놓고 빼내기를 반복하다 보면 꿈은 아니었나 보다. 빨래를 기다리며 핸드폰 속 여행 흔적을 찾아본다. 수많은 사진 속, 아이 얼굴에 햇살이 비춘다. 모래사장에서 미역 같은 해초를 건지며 밝게 웃고, 까만 얼굴 사이로 눈빛이 반짝인다. 지는 석양 사이로 우리의 그림자가 아련히 박힌 모래사장은 그 값을 매길 수가 없다. 그래, 이러려고 갔다 왔지. 같은 태양을 느끼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보러 우리는 또 결제할 수밖에 없다. 그 값에 휘청거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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