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마지막 날

by 샤프펜 Sep 25. 2024

필리핀 세부에서 지내는 마지막 주다.

새로운 일본인 룸메 코마키와 한국인 룸메 SJ 그리고 베트남 룸메 루나.

짧은 시간 지낸 인연이지만 우린 마치 오랫동안 함께한 사이처럼 마음이 잘 맞았다.

마지막에는 이들을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여기 온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20대, 30대 초반의 어린 친구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나를 보고, 또 큰 깨달음을 얻는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 나이와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마음이 맞는지 같이 있을 때 즐겁고 행복한지에 대한 여부이다.

오히려 나이와 환경이 비슷했던 러시아, 중국인 룸메보다 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훨씬 큰 행복감을 느꼈고, 진짜 나로 있을 수 있었다.

여기서 어린 친구들과 친구가 될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나를 어렵게 생각할 것 같아서 오히려 피해 다니고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했었다. 억지로 짜 맞추려고 했던 관계는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누구도 내 나이와 배경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데 괜히 혼자 찔려서 스스로를 40대, 아이가 있는 유부녀라는 제한된 틀에 가두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내가 많게는 20년 넘게 차이나는 이 귀여운 룸메들과 이렇게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릴 수 있다니, 마치 20년 전으로 타임워프를 한 것 같다.

난 여기에서 이 친구들과 몇 개월 더 영어공부를 한 뒤 이들을 따라 함께 호주로 떠나는 청춘이다.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이들과 동화되었다.


마지막 주는 '이것이 진정한 기숙생활의 묘미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나게 보냈다.

다 같이 한국식 고깃집에서 술도 마시고 운동도 하고 네 컷 사진도 찍고 자기 전에는 수다를 떨거나 게임을 했다. 한 날은 너무 늦은 시간까지 큰소리로 웃다가 다른 방 학생한테 항의를 받기도 했다. 

누군가는 나이 많은 어른이 애들하고 어울리며 철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제 나이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난 원래 덜렁거리고 장난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을 사랑하고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다. 40대, 50대가 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책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누구나 늙는다. 노인이 되어 얼굴이 쭈굴쭈굴 하고 허리는 구부정해 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데... 사람들은 원래의 나를 숨기고 자신이 만든 가면 속에서 어른스러운 척 살아가는 것이 어쩐지 씁쓸하다.


금요일이 졸업이긴 하지만, 난 모처럼의 기회에 혼자서 2박 3일 동안 세부 도심 여행계획을 세웠다.

아쉽지만 화요일까지 수업을 듣고 레벨테스트를 본 후 수요일 점심에 학교를 나오기로 했다.

마지막 수업일에 선생님들과도 아쉬운 작별을 했다.

많은 선생님들이 나의 조기졸업(?) 소식을 듣고 서운해하셨다.

헤어짐이 아쉬운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만큼 여기 생활이 즐거웠다는 증거이다.

정이 많고 다정한 필리핀 선생님들, 특히 리딩 1대 1 선생님인 '마조'티쳐의 서운해하는 모습에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수줍음이 많아 보였던 선생님은 수업이 거듭될수록 사실은 개그를 좋아하는 명랑한 20대 초반의 아가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실한 성품의 마조티쳐는 평소에 수업이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우리는 마지막 수업 시간 5분을 남겨두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나는 선생님한테 감사의 말을 전하며 포장된 작은 초콜릿을 건넸다.

마조티쳐는 내게 말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주고 상냥하게 대해줘서 너무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라고.

평소 말이 많지 않은 선생님의 눈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에겐 되고 싶은 이상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하고 싶은 영어공부를 실컷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는데, 이런 감동적인 말까지 듣다니... 

이 학교에 와서 이런저런 사고도 치고 처음에 많이 힘들었는데... 결국 마지막은 해피엔딩 영화의 한 장면 이라니... 난 참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다.


사랑스러운 룸메이트들과 마지막으로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언젠가 베트남 룸메의 고향인 하노이에서 만나기로 했다. 

혹은 호주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실제로 올지 모르지만, 우리는 헤어지는 아쉬운 마음을 이런 약속들로 달랬다.


이제는 진짜 안녕이다.

재밌고 좋은 룸메들, 다정한 선생님들, 개성이 다양한 클래스 메이트들 그리고 여러 추억이 담긴 학교를 뒤로하고 세부시티로 향하는 그랩을 잡아탔다.


나의 이 경험이 끝일지 이제 시작일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가슴이 끌리는 일이 있다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꼭 도전해봐야 한다는 거다.

남은 인생이 얼마나 남았든 간에 내 여건이 어떻든 내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행복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스타툰 https://www.instagram.com/sharppen2022/

이전 12화 탁구가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