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강연회에 간 적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나라에서 40만부 이상 팔린 책 <불안>의 작가이다. 그의 강연회는 콘서트장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무대를 둘러싼 모든 객석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심지어 계단에도 사람들이 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왜 그의 책에 열광하고 그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날 그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현대는 지위불안(Status anxiety)과 시기심을 앓고 있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통해 결국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중과 관심입니다. 미국의 자기계발서 시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져 있습니다.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성취주의' 와 함께 그만한 크기로 커진 '낮은 자존감' 치유가 이 두 가지 트렌드입니다.
시기심은 원래 자기 또래의 동성, 자기와 비슷한 부류 중에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에게 가지는 법이지요. 옛날에는 옷과 상징을 통해 표현되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어서 애당초 자신이 될 수 없는 존재에게 아무도 시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어요. 영국 여왕을 보세요. 정말 이상하게 옷을 입고 이상하게 행동하잖아요. 아무도 영국여왕을 시기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는 청바지를 입고 친구와 가족들을 위해 바비큐를 구우며 보통 사람과 같은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대중은 좀 더 똑똑하고 창의적이기만 했다면 자신도 빌 게이츠 같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이지요.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성취하지 못했을 때, 운이 없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패배자라고 스스로 자존감을 짓밟게 되는 이 사회는 정상이 아니지요. 불운과 행운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교육받은 패배감이고 사회병리학적인 문제입니다.”
빌 게이츠가 아무리 청바지를 입고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해도 나는 빌 게이츠를 시기하지 않는다. 알렝 드 보통이 얘기한 대로 ‘자기 또래의 동성, 자기와 비슷한 부류 중에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으로 비쳐지는 내 또래 직장 동료, 혹은 사회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전문가 그룹의 여성에 대해 시기심을 느낀다.
시기심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에서 참으로 미묘한 위치에 자리 잡은 감정의 스펙트럼이다. 동질감을 기본 바탕으로 하되 아주 미묘한 차이에 의해 갈라져 부정적인 감정으로 발전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시기심을 느꼈던 경우에는 항상 제 3자의 개입이 있었다. 나보다 그녀가 상사의 관심을 더 받는다거나, 더 빨리 승진한다던가, 나보다 더 매력적인 그녀가 재치 있게 말하며 친구들과 이성의 애정과 주목과 칭찬을 더 받을 때였다. 그러니 시기심은 언제나 제 3자가 주는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이 제 3자가 없을 때는 시기심도 일어날 일이 없다.
10년을 다닌 옛 직장을 떠나며 내가 꿈꾼 조건 중 하나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예전 직장에 있을 때 오랫동안 비슷한 또래에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받는 관심과 성취를 내 것과 비교하며 그리고 남들로부터 비교당하며 사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성취와 성장에 대한 욕심과 기대가 컸지만 스스로를 인정하는 자존감은 그다지 높지 못했기에 스스로를 들볶고 괴롭힌 결과였다.
결국 나는 비교 대상을 없앰으로써 내게 온전한 관심과 주목이 쏟아질 수 있는 환경을 원하며 이직을 선택했다. 이를테면 온갖 화려한 꽃이 피어있는 꽃밭에서 수수한 꽃으로 피어나 왜 나는 저들처럼 화려하지 못할까 고민하며 위축되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가 탁 트인 곳으로 옮겨 심어지자 온전히 내게 주어지는 햇빛과 물과 양분을 마시며 위로, 옆으로 한껏 뻗어가도 되겠구나 하고 안심하는 것과 같았다. 어쨌든 이렇게나마 이직을 통해 내 시기심은 비교 대상을 잃고 진정되어 갔다.
알렝 드 보통의 강연을 들은 후 굳이 환경을 바꾸면서 비교 대상을 없애는 어렵고 조건에 매인 방법 말고 시기심을 진정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나는 진단했다. 내 마음 속 준거 기준에서 제 3자가 주는 것들의 가치를 낮추고 나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의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다. 이 제 3자가 주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들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들일 수도 있다. 이 바깥에서 주어지는 준거 기준을 나 스스로 매기는 내적인 가치의 준거 기준으로 바꾸는 작업도 만만치는 않다. 남들이야 어쨌든 자신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한 명확한 확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누구에게나 열 때까지 두드려야 하는 문이다.
이제 이직 후 다시 10년 이상을 다닌 이 직장에서 능력 있고 야심 있는 상사가 새로 온 상황은 어떻게 보면 내 문제 패턴의 업그레이드 상황이다. 이제는 동료에게 가지는 시기심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내가 나의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새롭게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려 노력하여 직장 생활을 연장시키며 이곳에 남거나,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나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향해 출발하느냐의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변화의 시점이 되었을 때 변화를 선택하지 않으면 엉덩이를 뻥 차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나는 엉덩이를 뻥 차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성장을 위한 길은 빙빙 돌아가는 오르막길이 맞나 보다.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렸다고 생각되지만 결국은 같은 문제였다. 거의 15년이 지난 지금 역시 '자기 스스로를 믿는 자기 인정' 문제로 이 글들을 쓰고 있으니. 그래서 이 문제가 이번 생 지구별에서의 내 과제라고 하는 것이다. 떠나기를 선택한다면 이번의 선택은 직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꿈의 추구'이다. 대학 졸업 후 계속 취직과 이직에 목줄 매인 틀에 갇힌 마음으로 살았다. 이번에는 '돈과 생존'이 아닌 '꿈과 생명'을 추구해보련다.
사람마다 인생의 단계 단계마다 동일한 패턴으로 나타나는 그림자들이 있다. 그 그림자가 주는 시련 속에 자신을 해방시키는 탈출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 그림자들은 암흑에너지의 숨겨진 힘을 가지고 있다. 깊이 파서 다크 포스를 장착해보자. 나에게는 힘이 있어, 수십 년 쌓인 그림자의 힘이!
마음은 겹겹인 듯!
마음은 겹겹인 듯
새벽 마음 틀리고
아침 마음 틀리다.
마중물 지나 흙탕물,
더 깊이 내려가면
더 한 것도 못나오랴.
깊이 파묻은 안개의 독기 같은
막막함 지나가면
그리고 몇 겹 더 지나가면
맑을 물 솟을 거다.
암, 솟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