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이가 나를 사랑했던 날 - 놀이동산
소설 연재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선생님은 아침 9시까지 놀이동산 입구로 오라고 했다.
“정훈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손톱 끝, 발가락 사이사이, 양쪽 귀 뒤에 움푹 들어간 부분까지 꼼꼼하게 씻었다.
시끄러운 물소리에 깬 엄마가 눈을 비비며 화장실 앞에 서 있다.
나는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괘종 시계를 흘끗 본다.
새벽 다섯시. 남은 물기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새벽이라 그런가 쌀쌀하네.
“나중에. 나 늦었어.”
나는 양끝을 잡은 수건을 수직으로 세워 사정없이 머리카락을 털며 방으로 들어왔다.
작은엄마가 지난 추석에 사준 올인원 로션이라는 걸 발라본다.
처음 써보는 거라 약간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향이 꽤 맘에 들었다.
핸드폰 회사에 다닌다는 작은 아빠의 냄새가 났다.
어른의 냄새. 그리고 수컷의 냄새. 로션 하나 발랐을뿐인데 기운이 넘치고 거울에 비친 어깨가 더 넓어 보였다. 거기에 공장 냄새가 빠지지도 않은 체크 남방과 청바지를 입는다.
“자 이제 머리를 좀 만지고.”
형 방에 있는 왁스라는 걸 어제밤에 한 손가락 듬뿍 훔쳐 종이 위에 올려놨다.
그새 딱딱하게 굳은 왁스를 손바닥 힘과 체온으로 간신히 녹여 구렛나루 부분은 좀 누르고 정수리 부분에 볼륨은 살려본다. 자연스러운 것 같다. 왁스가 굳지 않았다면 양조절 실패로 떡진 머리로 나가야 했을 것이다. 때 하나 없는 흰색 운동화를 신고 마지막으로 신발장에 붙어있는 전신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짜식... 잘생겼네.”
도대체 주수민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 입구에서 담임이 티켓 줄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5시까지 여기로 다시 모이라는 선생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라져버렸다.
여자애들은 단체로 신났는지 우르르 뛰어가는 것 같더니 수민이도 거기 섞여 갔겠지?
그런데 오늘은 또 왜 그렇게 예쁜거야.
하늘색 후드티 입으니까 무슨 강아지 같잖아.
남들 듣기엔 낯부끄러운 생각이기에 속으로만 한다.
그때 누군가와 전화를 마친 강민혁이 다가와 어깨동무를 한다.
나는 이 자식이 싫다. 재수없게 실실 웃고 툭하면 친한척이다.
내가 보기엔 잘 생긴 것 같지도 않은데 여자애들이 얘 앞에만 서면 우물쭈물 거린다.
요즘따라 주수민도 얘 앞에서 조금 이상하다.
“윤정훈, 너 오늘 누구랑 놀꺼냐?”
“뭐...글쎄.” 나는 말 끝을 흐리고 속으로 이 자식을 다시 한번 욕한다. 다 알면서 뭘 물어. 내가 수민이를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주수민 뿐인데.
“나 지금 후룸라이드 타러 갈건데 갈래?”
“아니 나는 그거 안 좋아해서.”
“그래? 그럼 재밌게 놀아라.”
나는 그 자식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재빨리 수민이에게 전화를 건다. 길어지는 신호음의 마음이 타들어갈 듯 초조해진다. 달칵. “왜?”
귀찮다는 듯한 수민의 목소리도 반갑다.
“어디야?”
수민의 목소리가 새벽 다섯시처럼 쌀쌀하다.
“몰라. 끊어.”